말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들이는 것’
[말의 환경 바꾸기] 나의 영역을 만들어 놓고 말하라
“귤도 회하 이북으로 건너가면 탱자로 변한다고 합니다”: 춘추시대 중국은 14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으로 나뉜 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한 나라의 사신으로 타국, 특히 강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일이었다.
기원전 531년 어느 날, 제나라 경공이 상대부 안영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상대부는 오늘날 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당시 제는 진과 초라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환공이 ‘아홉 차례나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바르게 세웠던’ 백 년 전과는 다르게 국력 또한 쇠퇴해 있었다. 제는 이미 진의 세력 아래로 의탁했으나 두 나라의 관계가 굳건하지는 않았다. 한편 초를 다스리는 영왕은 2년 전 진나라를 멸망시켰던 전쟁광이었다. 만약 제가 초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면 얼마 못 가 초의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안영은 훗날 안자로도 불리는데, 성씨에 ‘자’가 붙었다는 것은 덕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사기》 <관안열전>에는 안자의 키가 ‘6척이 채 되지 않는다’라고 나오는데, 대략 140센티미터 정도의 단신이다.
초의 성문 앞에 도착한 안자는 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자가 주변을 살펴보니 성문 옆에 5척 높이의 자그마한 개구멍이 뚫려 있었다. 영왕이 체구가 작은 안자를 조롱하고자 만든 것이었다. 초의 관리들이 문 옆에 서서는 히죽거리며 안자가 개구멍을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안자가 돌아서더니 짐짓 물었다. “오늘 제가 개의 나라에 사신으로 왔다면 당연히 개구멍으로 들어가야겠지요. 그런데 만약 초에 방문한 것이라면 다른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는 ‘꾸짖음’과 ‘치켜세우기’라는 상반된 두 가지 의도가 모두 들어 있다. 초의 무례를 에둘러 나무라면서도 대국답게 행동하기를 요구함으로써 할 말이 없게 만든 것이다. 곧이어 정문이 열리자 안자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정문을 지나 초로 입성했다. 안자는 왕을 알현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 영왕은 서 있는 안자의 키가 앉아 있는 자신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타박하듯 굳이 책상다리로 바닥에 앉은 채 말했다. “그대와 같은 자를 사신으로 보내다니, 제에 인물이 그렇게 없는가?”
안자는 영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문했다. “제의 도읍인 임치는 칠천 가구가 넘게 사는 대도시입니다. 우리가 일제히 손을 내밀면 소매로 하늘과 태양도 가릴 수 있고, 흐르는 땀을 훔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걸으면 서로 어깨가 맞닿고 발끝이 발꿈치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우리 제에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안자의 말을 자르듯 영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그대가 사신으로 왔는가?”
안자는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답을 내놓았다. “우리 제는 사신을 구분해 보내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신은 현명한 임금을 뵙게 하고, 어리석은 사신은 어리석은 임금에게 보냅니다. 저는 가장 무능한 사람이어서 별수 없이 초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영왕은 미소를 지으며 술과 안주를 가져오라 명했고, 이에 안자도 자연스럽게 예를 갖춰 응했다. 사실 영왕은 안자가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 책사에게 방책을 물었다. “안영이라는 자가 제에서 말을 가장 잘한다고 들었다. 그자를 다스릴 방법이 없겠는가.”
책사는 이렇게 답했다. “적당한 때에 사람 하나를 끌고 지나가겠습니다. 전하께서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하문하시면 저희가 ’제나라 사람입니다’라고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다시 하문하시면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아뢰겠습니다.”
그리하여 영왕과 안자가 술을 마시는 중에 미리 짜둔 궁정 촌극이 시작되었다. 관리 두 명이 밧줄로 꽁꽁 묶은 죄인 한 사람을 끌고 두 사람 앞까지 온 것이다.
영왕은 짐짓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지금 과인이 사신을 맞는 줄 알면서도 이리 끌고 왔는가?”
그러자 옆에 선 신하가 바로 대답했다. “저 자는 제나라 사람으로 도둑질을 했습니다.”
영왕은 웃음기를 거두더니 안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제의 백성들은 모두 도둑질을 좋아하는가 보오?”
이에 안자는 과일 쟁반에서 귤 하나를 집어 들더니 찬찬히 보다가 이렇게 답했다.
“소신이 듣기에 이 귤이 회하 이남에서 자라면 귤이 되지만, 회하 이북에서 자라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잎의 모양은 비슷해 보여도 먹어 보면 맛이 전혀 다릅니다. 바로 땅과 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백성이 제에서는 평안하게 지내다가 초에 와서 도적이 되었으니, 이 땅과 물이 도둑질을 가르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왕은 재빨리 술잔을 들고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어찌 현자를 모욕하려 했단 말인가. 이야말로 자업자득이요,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리고 말았소!”
이후 영왕은 안자에게 후한 선물을 내리고, 제로 돌아가는 길에도 사람을 보내 돌보게 했다.
내 환경 속으로 상대를 끌어들인다: 이 일화에서 안자는 대화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설정한 말의 환경으로 상대방을 유도했다. 이처럼 ‘의사환경(pseudo-environment)’을 설정해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화술을 가리켜 ‘말의 환경 바꾸기’라고 한다.
‘의사환경’은 미국의 사회학자 월터 리프먼이 제시한 개념으로 타인이나 매스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설정’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내린 가설을 뜻한다. 다시 말해 ‘말의 환경 바꾸기’란 논쟁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자신의 말이 설정한 환경 속으로 집어넣는 기술이다.
스티브 잡스는 ‘현실을 뒤틀어버리는 힘’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곤 한다. 예를 들어 잡스는 아이폰을 출시하며 배터리를 교체할 필요 없는 새로운 휴대폰이라고 단언했다. 이전 핸드폰들과는 다르게 아이폰의 뒷면에는 배터리 교체용 덮개가 없었으니 잡스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다만 아이폰 사용자들은 배터리를 교체할 필요가 없는 아이폰에 스스로를 맞춰가며 휴대폰만큼이나 무거운 보조 배터리를 따로 챙겨야 했을 뿐이다.
이처럼 ‘말의 환경 바꾸기’는 사실을 재설정해 대화의 초점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화술이다.
틈이 있고 유연해야 말이 단단해진다
[입증 극대화하기] 말이 꽂히는 최적의 순간은 따로 있다
“지금의 결정으로 아버지께서 서러워하지 않을는지요”: 이필은 당 시기 현종부터 숙종, 대종, 덕종까지 네 황제를 섬겼다. 군주를 섬기는 일은 호랑이 돌보기와 똑같다 하니 이 내력만 봐도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755년 12월, 당시 절도사였던 안녹산이 사사명 등과 함께 15만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바로 안사의 난이다. 이듬해 6월, 반란군이 장안으로 쇄도하자 현종은 성이 무너지기 전에 도망쳐 파촉 땅인 성도로 피신했다. 한편 삭방으로 망명한 태자 이형은 다시 진용을 정비해 영무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훗날 숙종으로 칭해진 그는 당나라의 일곱 번째 황제이자 도성 밖에서 즉위한 첫 번째 황제다. 숙종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한 다음 아버지 현종을 성도에서 모셔와 태상황으로 삼았다.
이후 숙종은 이임보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유골을 불태우려고 했다. 태자 시절에 이임보가 현종에게 자신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으며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소식을 접한 이필이 황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오랜 원한을 갚으려는 황제의 앞을 감히 가로막고 반대하는 신하라니, 이는 초인적인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천자가 되어 넓은 마음을 천하에 보이지 못한다면 이전에 미움을 샀던 자들이 반드시 놀라 두려워하며 화를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그저 이번 일로 감히 맞서는 자들이 천자를 따를 생각을 떨쳐 버리고 끝까지 저항하게 될까 봐 염려할 따름입니다.”
현종 시기부터 조정의 노신으로 여러 차례 태자를 감쌌던 이필이 나서서 설득하니 사람들은 이쯤에서 숙종의 복수가 흐지부지 끝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숙종은 이필의 말을 듣고 더욱 격노하며 말했다. “이 도둑놈이 온갖 모략을 저질러 짐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짐이 오늘까지 살아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하늘이 보우하셨기 때문임을 그대도 알 것이다. 이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놈에게 어찌 자비를 베풀 수 있겠는가?”
숙종의 말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이임보에 대한 증오이고, 다른 하나는 이필에 대한 의문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이 결합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한 황제 앞에서 보통은 입을 다물어야 했으나 이필은 지혜로운 말로 상황을 진정시켰다.
“이임보가 한 짓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선제께서 천하를 반백 년 동안 다스리시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파촉까지 가셨습니다. 자신의 신하를 증오해 무덤을 파고 유골을 불태우려는 것을 선제께서 아신다면 이전에 내린 결정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혹여 선제께서 회한으로 몸져 눕기라도 하시면 세상은 천자가 천하를 껴안으면서도 정작 어버이는 돌보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은 계단을 내려와 이필을 껴안고 흐느꼈다. “짐이 그대처럼 깊이 생각하지 못했구나. 어리석게도 증오에 눈이 멀었어.”
순식간에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아야 한다: 이필은 격노에 휩싸인 황제를 정면으로 타이르다 실패하자 말머리를 돌려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이는 그가 사용한 화술인 ‘입증 극대화하기’가 일으킨 효과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고작해야 단 몇 마디를 전할 짧은 시간뿐이었다. 이성을 잃기 직전인 사람한테는 절절한 진심을 담아 백만 가지 이유를 제시해 봤자 어차피 제대로 닿지도 않는다. 누가 설득해도 소용이 없을뿐더러 괜히 말을 건넨 사람만 적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물며 상대방이 황제라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입증 극대화하기’는 이성을 잃어가는 상대방이 그래도 ‘아직은 듣는 척이라도 하는’ 골든아워 안에 가장 강력한 이유를 재빨리 선택해서 의사를 전하는 화술이다. 이 고사에서 이필이 여러 논거 중에서 선택한 가장 강력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신의 분노에 공감한다. 그러나 당신이 분노하는 사람은 당신의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이다.
둘째, 당신의 아버지는 현재 건강이 좋지 않다. 그리고 당신이 분노하는 사람은 이미 사망했다.
셋째, 당신이 그자의 시신을 파내 훼손하면 당신 아버지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넷째, 사람들이 이 일을 알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필은 이렇게 집안일, 나랏일, 천하의 일까지 모두 아우르는 가장 강력한 명분을 들어 분노에 휩싸인 숙종의 광기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숙종은 이필의 말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곧 이성을 되찾았다. 이필이 재빠르게 내세운 명분이 강력하지 않았다면 황제의 분노는 그에게도 쏟아졌을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자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훼손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나 극악무도한 행위로 비난받기 마련이다. 만약 숙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수를 감행했다면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보통의 말로 비범하게 말하는 것이 화술이다
[규칙에서 벗어나기] 규칙을 존중하고 나서야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사자를 차마 벌할 수 없으니 대신 마부를 베겠다: 전씨 가문의 시조는 전완으로 진나라의 군주였던 진려공의 아들이다. 전완은 왕족이나 궁궐 암투에 말려들어 급히 제나라로 떠났으며, 전양저는 그의 방계 후손이다. 전완 일가는 대대로 제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다. 제는 강태공의 영지였으므로 제의 국군(임금)은 모두 강태공의 후손들이다.
경공시대에 들어 진과 연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제를 공격하자 제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이때 상대부 안영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경공에게 전씨 집안의 서자 전양저를 추천했다.
“양저는 비록 첩의 소생이나 문필에서 재능이 뛰어나 따르는 자가 많습니다.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 충분히 적을 위협할 수 있으니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이에 경공이 전양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 봤더니 과연 대단한 인재였다. 경공은 즉시 전양저를 대장군으로 임명한 다음 진과 연을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전양저는 명령을 받들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원래 출신이 비천한데 전하께서 중용하시니 갑자기 신분이 여러 대신보다도 높아졌습니다. 장병들은 이런 제게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도 저를 신뢰할 리 없습니다. 자격이 부족한 사람은 위신을 세울 수 없는 법입니다. 바라옵건대 그동안 전하의 총애를 받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신하를 보내어 군을 감독하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신이 명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경공은 이를 허락하고 장가를 감군으로 보내기로 했다.
전양저는 장군이 내린 명령을 기록하는 영부를 받아 출정을 준비했다. 경공에게 출정 인사를 올린 전양저가 장가에게 말했다.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만납시다.”
이튿날, 전양저는 먼저 군문에 도착해 시간을 재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세워 놓고 장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장가는 이전부터 국군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군으로 나설 때에도 환송하러 온 사람들과 함께 낮까지 술을 마셨다.
전양저는 아무리 기다려도 장가가 오지 않자 해시계를 넘어뜨리고 물시계는 깨뜨려 전부 치워버렸다. 그리고 혼자 군영으로 들어가 순시하며 병사를 점검한 뒤에 자신이 만든 각종 규정과 군령을 선포했다. 장가는 이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만취한 상태로 군문에 도착했다.
전양저가 “어찌하여 약속한 시각보다 늦었습니까?”라고 묻자 장가는 “친척과 친구들이 주는 송별주를 몇 잔 마시다 보니 그만 지체했소.”라고 대꾸했다.
이 말을 들은 전양저는 정색했다. “군을 다스리는 장수로서 명을 받으면 그날로 가족을, 군법이 선포되면 사사로운 관계를, 북을 치고 돌격할 때는 생사를 잊어야 합니다. 지금 적의 대군이 국경까지 쳐들어왔으니 나라에는 소란이 일어나고, 전선의 장병들은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으며, 국군께서는 편히 주무시지 못하고 수라를 드셔도 맛을 모르십니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가 모두 귀하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하여 송별주를 마실 수 있습니까?”
이어서 전양저는 군법을 관장하는 군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군정은 말하라, 군법에 약속된 시간을 어겨 도착한 사람은 어떻게 처벌하라 되어 있는가?”
군정이 답했다. “참형에 처합니다.”
장가는 그제야 덜컥 겁이 나 급히 사람을 보내 경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공에게 일을 알리러 간 사람이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장가는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전양저가 잘려 나간 장가의 머리를 들어 모두에게 보이자 삼군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한참 뒤에 경공이 보낸 사자가 장가의 사면령을 들고 왔다. 수레 하나가 쏜살같이 군영 안으로 들어오더니 사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황제의 명을 읽었다. 전양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장수가 밖에 나가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소!” 이어서 그는 군정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군영 안에서는 수레를 몰고 함부로 달릴 수 없다. 군정은 말하라, 군법에 따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정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참형에 처합니다.”
사자가 혼비백산하자 전양저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국군의 사자인데 함부로 목을 벨 수 없지. 대신 사자의 마부를 베어 일벌백계하겠다!”
전양저는 마부를 참수한 뒤, 수레의 왼쪽을 부수고 왼쪽에서 수레를 끄는 좌참마까지 죽여 모두에게 보였다. 그리고 사자에게 그 수레를 끌고 경공에게 돌아가도록 한 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전양저는 행군하면서 병사들의 막사를 살피고, 우물을 파고, 땅에 솥을 묻어 밥을 짓고, 다치거나 병든 병사들에게 약을 주는 등 크고 작은 일들의 처리를 도맡았다. 그리고 장수에게 지급되는 보급품을 모두 풀어 병사들에게 나눠 주면서 늘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었다. 또한 병약한 병사들을 따로 쉬게 한 뒤 군대의 편제를 재정비해 전쟁을 준비하자, 그들은 앞다퉈 함께 전장으로 향하기를 원했다.
진나라는 전양저가 호랑이, 늑대에 비견할 정도로 용맹한 군사들을 이끌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철군했다. 연나라는 전양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을 거느렸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으로 후퇴할 계획을 세웠으나 황하를 건너는 도중에 전양저의 군사들에게 맹렬한 추격을 받은 끝에 대패했다. 전양저는 이전에 잃었던 제의 영토를 모두 되찾아 도성으로 돌아왔다.
경공은 신하들을 이끌고 직접 성 밖까지 나와 용사들을 맞이했다. 경공은 전양저를 크게 칭찬하고 대사마로 임명했다. 진에서 제로 피난 온 전씨 집안은 이때부터 나날이 더 고귀해지고 강성해졌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양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귀족들이 그를 헐뜯기 시작한 것이다. 경공은 그 말에 넘어가 전양저를 좌천시켰고, 울분을 참지 못한 전양저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전씨 집안은 전양저를 중상모략한 귀족들을 증오했다. 전양저의 친족인 전걸도 그중 하나였다. 훗날 전걸의 후손인 전화는 스스로 왕이 되어 전국시대 ‘전씨의 제’, 즉 전제를 건국했다.
적정선을 찾아 유연하게 대응한다면: 전양저가 보여준 화술은 ‘규칙에서 벗어나기’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엄격한 순서와 규정이 있으며, 이를 잘 따라야 말에 힘이 갖춰진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기법’을 조정해야 하는 때가 있다. 이러한 기법을 거스르는 기법은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이 바로 ‘규칙에서 벗어나기’의 핵심이다. 규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이 확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마련되고 난 다음에야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며 세부적인 규칙을 조정할 수 있다. 규칙 없이 상황이 닥치는 대로 처리하는 방식은 능동적이고 유연한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의 대응일 뿐이다.
이처럼 규칙을 조정할 때 중요한 점은 적정선을 찾는 것이다. 누군가는 적정선을 찾지 못할까 봐 처음부터 겁을 먹고 고지식한 태도를 고수한다. 말을 잘못해서 낭패를 보느니 아예 입을 다물겠다는 태도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스스로의 재치를 과시하며 적정선을 넉넉하게 잡는다. 이와 같은 경우 주관적인 어림셈이 객관적 규칙을 넘어설 때 큰 실수가 발생하게 된다.
전양저가 현명했던 부분은 법을 집행하기 전에 군정에게 군령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 즉 대전제를 먼저 물어본 데 있다. 전양저의 두 번째 법 집행을 떠올려 보자. 그는 엄격한 형벌로 다스림으로써 삼군에 모범을 보인다는 큰 방향은 그대로 두되 대신 죄를 받을 사람을 바꿨으며, 이어서 수레의 왼쪽을 부수고 좌참마까지 처형했다. 합리적인 적정선을 잘 잡은 임기응변이라 하겠다.
전양저는 강태공 이후 병법가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꼽힌다. 특히 《사마양저병법》에 나온 그의 사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떻게 해야 대화를 장악할 수 있을까?
[가능성 추측하기]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상대를 미치게 만들어라
“나도 황제가 되었는데 그대들이라고 왜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옛사람들은 ‘천하는 나뉘어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 있으면 반드시 나뉜다’라고 생각했다. 중국사에서도 당의 통일은 오대십국이라는 분열을 거쳐 다시 송이라는 통일로 이어졌다.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송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문치가 번영한 데 비해 무학이 쇠퇴했다’와 ‘오랫동안 가난하고 쇠약했다’일 것이다. 그러나 송 태조 조광윤이 ‘술로 병권을 내놓게 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기틀을 다진 송은, 실제로는 결코 문약한 국가로 시작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주군인 세종을 따르며 큰 공을 세웠고, 차근차근 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무인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자 태조장권을 만들어 보급했을 정도로 무공에도 뛰어났지만, 동시에 관우처럼 《춘추》를 비롯해 다양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조광윤은 학문과 지식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재상은 반드시 학자를 써야 한다”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재상 조보는 조광윤의 권유를 받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논어》를 절반만 알아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라는 말을 실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조광윤은 중국사에서 역대 건국자 가운데 가장 쉽게 보위에 올랐다. 바로 ‘진교병변’을 통해서다.
960년, 대장군 조광윤이 외적을 막아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이들은 도성을 떠난 뒤 개봉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진교역에 주둔했다. 조광윤은 병권을 손에 쥐고 도성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오랫동안 준비한 반란을 실행할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그날 밤 조광윤의 측근들이 장수와 병사들 사이를 돌며 말했다. “지금의 천자가 어리고 몸이 약하니 모든 권력이 간신들 손에 들어갔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리며 적을 물리쳐도 누가 그 공로를 알아주겠는가? 먼저 조광윤 장군을 황제로 옹립한 후에 북벌을 떠나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평소 조광윤이 군에서 위신을 쌓고 명성을 얻은 덕에 반란의 분위기가 금세 무르익었다.
이튿날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와 측근 조보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가 막 잠에서 깬 조광윤에게 미리 준비해 둔 황포를 입히고 모든 장수와 병사가 모인 곳으로 데려가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몇 리 밖에서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 일이 바로 ‘황포가신(黃袍加身)’의 유래다.
조광윤은 ‘억지로 끌려온 양’ 행동했지만, 주변에서 간곡하게 설득하니 ‘민심’을 따르겠다며 반란군을 이끌고 수도 개봉으로 향했다. 도성을 지키던 장수들은 모두 조광윤과 ‘형제의 연을 맺은’ 자들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문을 열어 이들을 맞이했다. 덕분에 진교병변에 참여한 장수와 병사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조광윤은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주 손쉽게 후주의 권력을 장악한 뒤, 송을 국호로 삼고 개봉을 도읍으로 정했다. 개국 연호는 건륭으로 역사는 이 나라를 ‘북송’이라고 부른다.
조광윤은 신분이 바뀌니 마음가짐도 같이 바뀌었다. 황제가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어떻게 권력을 지킬지 걱정부터 앞선 것이다. 당시는 몇 년마다 황제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던 난세였다. 가장 큰 문제는 당 말기부터 무장들의 세력이 너무 강해졌다는 것이었다. 조광윤 자신도 절도사였다가 황제가 되었으니 누군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고심을 거듭한 조광윤은 무장의 병권을 약화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사실 이미 많은 권력자들이 시도했으나 역효과만 불러 일으켰던 시도였다. 다행히 그는 천 년 후인 지금 봐도 훌륭한 화술로 목적을 달성한다.
961년 7월 9일 밤, 즉위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조광윤이 금군장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조광윤이 시종들을 물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대들의 힘이 없었다면 짐은 오늘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짐은 늘 그 공덕을 되새기고 있다. 하지만 황제 노릇이 너무나 힘겨우니 차라리 절도사를 할 때가 더 즐겁고 편했다. 요즘은 생각이 많아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구나.”
장군들은 그 말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조광윤은 “아직 모르겠는가? 누군들 황제를 시기하지 않고, 누군들 황제 자리를 탐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장군들은 깜짝 놀라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에 조광윤이 말했다. “물론 형제나 다름없는 그대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이 짐에게 한 것처럼 주변에서 억지로 황포를 입힌다면, 그때에는 설령 황제가 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장군들은 자신이 이미 의심을 받고 있으며,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머금은 채 연신 절을 하며 “저희가 어리석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조광윤이 천천히 말했다. “세월은 빠르고 인생은 짧구나. 부귀를 원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모아 즐거이 살고 후손들 또한 가난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짐이 생각해 보니 병권을 내놓고 지방 관리로 한가로이 지내면서 밭과 집을 사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며 노년을 편히 보내는 편이 그대들에게 이로울 것 같구나. 기녀들과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말년을 보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않겠는가. 또 그대들과 사돈을 맺어 군신 사이에 서로 의심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느냐?”
조광윤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들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황제가 이미 중앙 금군을 확고히 장악했기 때문에 장군들은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은덕에 감사함을 표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튿날, 장군들은 늙고 병들어 병권을 내려놓고자 하니 허락해 달라는 상서를 올렸다. 조광윤은 흔쾌히 수락하며 여러 고위 장군의 병권을 거둬들이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고 통제하기 쉬운 젊은 장수들만 남겨뒀다. 이렇게 해서 송 태조 조광윤은 당이 멸망한 뒤 무장이 득세하는 난국을 해결하고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했다.
억지처럼 보여도 부정하기 어렵다: 조광윤이 장군들에게 병권을 내놓도록 압박할 때 사용한 화술은 ‘억단(臆斷)’을 활용한 ‘가능성 추측하기’다. 여기서 억단이란 아무 근거도 없이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가능성 추측하기’란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억단하는 것을 뜻한다. 이 화술은 두 가지 논리를 포함하는데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첫째, 확실한 근거 없이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주관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둘째,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모조리 나열하고 나면, 그중 단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어려워진다.
이처럼 객관적인 척하는 법칙 아래에서 주관적으로 억단해 말하면 상대방은 그 일이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충분한 논거를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조광윤이 술자리에서 장군들과 나눈 대화에는 총 세 번의 ‘가능성 추측하기’가 나왔다.
첫 번째는 ‘누군들 황제를 시기하지 않고, 누군들 황제 자리를 탐하지 않을까?”라는 것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욕망에 대해 억단했다.
두 번째는 “너희의 부하들이 억지로 황포를 입힌다면 어찌하겠느냐?”라는 것으로, 자신이 이미 겪었던 실제 사례를 제시하며 이러한 일이 반복될 가능성을 억단했다.
세 번째는 “너희는 병권을 내려놓고 낙향해 나와 사돈을 맺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가능성에 바탕을 둔 권유다. 즉 앞의 두 억단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억단한 다음, 이러한 의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관계를 맺고 쿠데타가 벌어질 수 있는 아주 조금의 가능성까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조광윤의 억지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가 예측하는 측근의 반역 시도가 실제로 발생할 확률이야 낮겠지만, 석수신을 비롯해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미 반역을 한 차례 성공시킨 인물들이기에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군들은 조광윤의 억단에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칙이 있어야 말이 휘청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최저선 지키기] 마지막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한 한마디
“제 아들을 쓰시겠다면 저희 일족과 연을 끊게 해주십시오”: 전국시대 사대 명장이라고 하면 진나라 장수인 백기와 왕전 그리고 조나라의 장수인 염파와 이목을 가리킨다. 조에는 유명한 장수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들 말고도 유명한 조의 장수로는 조사를 꼽을 수 있다.
조사는 원래 세금을 거둬들이는 관리였다. 당시 그는 평원군 밑에서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 아홉 명이 납세를 거부하자 법률에 따라 처형했으며, 평원군에게도 “나라의 세금은 백성에게서 거둬 백성에게 쓰는 것입니다.”라고 직언하면서 ‘법령에 따른 조세 정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에 크게 감동한 평원군은 조 혜문왕에게 조사를 추천했다. 이때부터 조사는 나라 전체의 재정과 세금 징수를 관리하게 되었고, 조의 세법은 점차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270년, 진이 한나라를 공격하며 대군을 알여에 주둔시켰다. 다급해진 한왕이 조에 도움을 청하자 혜문왕이 장수들을 불러 이에 대해 논의했다. 염파와 낙승은 가는 길이 좁고 워낙 거리가 멀어 지원군을 보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길이 멀고 땅은 좁아서 마치 쥐 두 마리가 통로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더 용맹한 쪽이 반드시 이깁니다.”
혜문왕은 이 말에 동의하며 조사에게 군사를 내어주고 한을 구하도록 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좁은 곳에서는 용감한 자가 이긴다는 ‘협로상봉용자승(狹路相逢勇者勝)’의 유래다. 전쟁은 조의 대승으로 끝났다. 조사는 공을 인정받아 마복군에 봉해졌으며 그 지위가 염파, 인상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기원전 266년 혜문왕에 이어 세자인 조하가 조왕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효성왕이다. 기원전 262년, 진이 또 한을 공격하자 한은 상당군을 내어주고 화의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상당군을 지키던 장수 풍정은 진에 투항하기를 거부하면서 차라리 자신이 관리하던 상당군의 열일곱 성을 조에 바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진이 격노해서 땅을 가져간 조로 화살을 돌리게 하려는 음흉한 심산이 깔려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땅을 얻게 된 효성왕은 큰 경사라며 매우 기뻐했다. 여기에 전국사공자 중의 한 사람인 평원군 조승까지 맞장구치니 평양군 조표가 애써 말려도 소용없었다. 효성왕은 즉시 상당군을 점령하고 염파의 군대를 장평에 주둔시켰다. 이런 결정들은 당연히 진을 자극했고, 얼마 후 진이 장평을 공격하면서 장평대전이 발발했다. 사마천은 ‘이령지혼(利令智昏)’이라는 표현으로 이때 조승이 이익에 눈이 멀어 이성과 지혜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기원전 262년에 발발한 장평대전은 시작부터 격렬했다. 장평에 주둔한 염파의 재주가 비범해 아무리 공격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진은 조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진은 옛날에 좁은 길에서 만났던 명장 조사가 두려워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 심지어 조사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도 조의 내로라하는 장수들 보다 조사의 아들 조괄을 가장 두려워할 정도다. 대장군 집안의 새끼 호랑이가 가업을 이어받기로 마음먹으면 진이 필시 곤경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효성왕은 머리가 복잡해져서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더니 결국 조괄을 불러서 대장군으로 삼고 최전선에서 싸우던 염파를 대신하게 했다. 당시 중병을 앓던 인상여는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효성왕에게 달려가 만류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허명만으로 대장군을 결정하십니까? 조괄은 기껏해야 아비인 조사가 쓴 병서나 읽었을 뿐, 아직은 병서에 담긴 전술을 유연하게 활용하지 못합니다. 전쟁의 임기응변을 모르니 대장군으로 삼으시면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효성왕은 인상여의 충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끝내 조괄을 대장군 자리에 앉혔다. 이때 조괄의 어머니도 효성왕에게 제발 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다. 친모까지 나서서 아들의 출세를 막으려고 했다는 데에서 당시 조괄이 중용되기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첩의 아들이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스스로 필적할 사람이 없는 실력을 갖췄다고 여기나 사실 아직도 전쟁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한번은 첩의 지아비인 조사가 아들과 포진법에 대해 토론했는데 그조차 아들에게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지아비는 아들이 전쟁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첩이 그 까닭을 묻자 전쟁이란 병사들의 사활이 직결된 큰 문제인데 아들은 그저 느긋하고 가벼운 태도를 보인다면서 장차 중용되지 않으면 괜찮으나 중용된다면 반드시 조를 망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효성왕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자 조괄의 어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옛날에 제 지아비가 장군이었을 때 함께 음식을 나누며 식사하는 사람만 십수 명이었고, 형제이자 친구라고 믿고 의지할 사람들이 백 명을 넘었습니다. 나라나 종실에서 내린 하사품은 모두 아랫사람에게 베풀었으며 출병하기로 결정된 날부터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일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 첩의 아들은 갑자기 발탁되어 신분이 고귀해지니 사람들의 인사나 받으려고 하지만 장수 가운데 누구도 그를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이러니 누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까? 나라에서 하사한 재물은 모두 집에다 쌓아두고는 매일 전답이나 집을 살피러 나갔다가 괜찮은 것을 보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사들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런 조괄이 조사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 둘은 피가 이어진 부자지간이나 사람됨이 완전히 다르니 절대 조의 군사들을 지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효성왕은 듣다가 짜증이 났는지 “과인이 결정한 일이니 부인은 더 이상 관여치 말라”라며 말을 잘랐다. 조괄의 어머니는 효성왕이 보인 반응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만약 전하께서 꼭 조괄을 대장군으로 삼으시겠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제 집안이 연좌되지 않게 해주시겠습니까?” 이에 효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기어코 장평대전의 대장군이 된 조괄은 부임하자마자 염파가 정한 군령과 지침을 모두 바꾸고 부하와 군의 문관들을 대거 교체했다. 진의 대장군 백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후퇴한 후, 조의 보급로를 끊고 조괄의 군대를 둘로 쪼개서 군령이 전달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40여 일 후, 절망한 조군은 자폭에 가까운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으나 대패했고 조괄은 전사했다. 병사 5만이 죽고, 40만은 투항했으나 곧 생매장되었다. 조괄의 어머니는 효성왕이 이전에 했던 약속이 있어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는 ‘지상담병(紙上談兵)’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최후의 한가지만이라도 지키는 선택: 나라가 곧 무너지려 할 때, 조괄의 어머니가 자신과 집안을 구하기 위해 쓴 화술은 ‘어쩔 수 없이 최저선 지키기’다. ‘어쩔 수 없는’이라는 말은 화자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이상 찾지 못해 마지못해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의미다. 다만 이 화술에서 중요한 점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막다른 곳에 도달하기까지 취했던 노력들이다. 조괄의 어머니는 ‘일족의 안전’이라는 최저선을 사수하기 전까지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다 최저선이라도 지키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최저선’이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의미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구사할 수 있는 모든 화술을 써서 설득했음에도 결국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적어도 마지막 하나는 지키는 것’이다. 그 하나가 무엇인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목숨을 지키는 사람도 있고, 재산을 지키는 사람도 있으며, 가족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조괄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효성왕이 자신의 아들을 대장군 자리에 앉히는 일만은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왕한테 상관하지 말라는 말까지 들은 이상 그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괄의 어머니는 일족의 안전이라도 부지하는 최저선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