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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세요, 런던의 심리상담실] 요약 (인이이 지음 / 이든서재, 2025년)

by 이나이신기 2025. 5. 9.

잠시 쉬어가세요, 런던의 심리상담실
인이이 지음 / 이든서재

CHAPTER 1. 불안과 우울을 직면하라

 

최고의 효율을 위해 질주하는 남성 _ ‘효율이라는 말로 자신을 옭아매지 마라

내가 소속된 상담실은 런던에서도 상담비가 비싼 센터 중 하나로, 유명한 투자은행과 하이테크 기업을 포함한 많은 대기업이 사원들의 심리상담을 지정한 곳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매일 만났다. 그리고 오늘의 내담자도 그중 한 명이다.

 

얼핏 서른 정도로 보이는 그는 혹여나 머리카락이 한 가닥이라도 삐져나올세라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잘 단련된 몸에 고급 맞춤 양복을 입은 전형적인 엘리트 직장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박사님, 상담을 10분만 일찍 끝내줄 수 있어요? 회의가 있는데 늦을까 봐 걱정돼서요. 오늘 박사님과 상담하려고 새벽 조깅도 뺐다니까요. 제게 40분이나 할애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그럼, 오늘 상담도 빨리 감기모드로 진행하기를 바라시나요? 불안해 보이셔서요.” 나는 농담 삼아 답하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제가 불안해서 찾아온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너무 바빠서 불안할 틈도 없을 정도라니까요. 제 증상 좀 빨리 치료해 주세요. 상담 한두 번 받으면 되겠죠?”

불안 증상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오셨으면서 또 불안 때문에 상담 횟수를 8회에서 2회로 줄이자는 말씀이네요. 자신에 대한 인내심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근데 정말 인내심을 가질 시간이 없어요! 저는 회사 관리직 중에 유일한 중국인이에요. 완벽하게 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 이 불안 증세가 저를 귀찮게만 안 했어도 심리상담 같은 거에 시간 낭비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남성은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것 자체를 시간 낭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노력만 하면 뭐든 최고로 해낼 수 있다고 믿어왔어요. ‘최고만이 가질 만한 가치를 가진다라는 게 제 인생의 신조였죠. 저는 어릴 때부터 최고로 손꼽히는 학교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았고, 전액 장학금을 받고 영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어요. 지금 제가 받는 급여도 또래 중에서 가장 많고요. 최고의 모습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라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그럼 항상 이기는 인생에 대한 대가는 생각해 보셨나요? 모든 결정과 행위에는 대가가 따르죠. 불안도 일종의 대가라고 볼 수 있어요. 정말로 패배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오랫동안 불안해야 하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나요?”

 

그는 잠시 멈칫했다. 이 질문은 그가 그린 인생의 청사진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듯, 한참 뜸을 들이며 고심하더니 내게 되물었다.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알고 있어요. 인생의 최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건가요? 이기고 싶다는 게 잘못인가요?”

그런데 인생에 승자 혹은 패자, 이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너무 좁은 것 아닐까요? 그리고 승패는 결과일 뿐이잖아요? 결과를 얻기 이전에 우리는 길고 긴 과정을 거쳐야 하고요. 인생은 영화가 아니라서 당연히 빨리 감기가 안 돼요. 그렇지 않나요? 제가 빨리 불안을 치료해 주기를 바라시지만, 치유 과정이 시작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고, 본인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이런 것들은 빨리 감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더욱이 승패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요.”

 

깊은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할 노력으로 인생길을 걸어오셨을 거라는 짐작이 가네요. 그런데 말씀하신 최고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도 분명히 있었겠죠? 그때는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당연히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죠. 노력도 부족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느낌이었어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고로 해낼 수 있을 거라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럼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가 무엇인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본인에게 최고의 기준은 뭐죠? 그 기준은 어디서 온 건가요?”

최고의 기준이 어디서 나왔냐고요?”

그가 대답을 찾으려 고심했다.

아마도남들의 평가?”

그러면 그들이 내담자님의 불안을 책임질 수 있나요? 내담자님의 감정과 정신 건강을 지켜줄 수 있을까요?”

 

심리학에서 최고라는 단어는 비교의 의미를 크게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최고를 이루려고 노력할수록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을 때 자기 부정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 스스로 최고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 실패의 여지가 없다, 착오는 허용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패나 통제력 상실도 인생의 일부임을 알아야만 한다. 또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실패나 좌절은 더 나은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미국심리학회가 2012년에 제안한 외상 후 성장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에 오히려 자극을 받는다. 사지에 몰렸을 때 생존하기 위해 발동한 동기가 내면을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얻은 풍부한 성장 경험이 다음 좌절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길 바란다. 더불어 계속 승자가 될 필요도 없다. 인생은 시합이 아니라 성장의 경험을 하나씩 쌓아 만드는 견고한 보루와 같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상담이 진행되던 날, 그가 주도적으로 내게 물었다.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제 감정을 책임지기로 생각을 정리했어요. 이제 방법을 알려주실래요?”

역시 효율의 달인답게 시간을 알차게 쓰시네요. 방법을 말씀드릴 순 있지만 지름길은 아니랍니다. 우선 새벽 조깅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조깅을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조깅과 제 감정이 무슨 상관이죠?”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답을 이어갔다.

조깅을 시작한 지는 5년 되었어요.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빅토리아 공원에서 5km를 뛰고 샤워한 다음 출근해요.”

그럼 지난 5년 동안 계절의 변화에 주목한 적은 있었나요? 새싹이 파릇파릇 돋고 꽃이 활짝 피는 걸 눈여겨본 적이 있으신가요? 계절마다 공원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5km의 목표를 완성하고 나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던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저 5km라는 목표만 생각했죠.”

맞아요. 결과에 모든 초점을 맞추면 주변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진정한 삶의 경험도 부족해지죠. 인생은 답안지가 아니라서 정답이 없죠. 대신 종점에 도달하기 전에 더 많이 체험하고 경험해야 진짜 자기 인생의 트랙에서 뛸 수 있어요. ‘불안은 우리의 내면이 자신에게 액셀을 너무 세게 밟고 있으니, 가끔 브레이크도 밟아야 해.’라고 알려주는 것과 같아요. 만약 불안이 알려주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 거예요. 그럼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게 되죠.”

 

말을 마친 나의 시선이 창끝에 걸렸다. 때마침 정말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그도 내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이제 알 것 같아요. 저는 승리를 제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마음가짐은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요. 그럼 제가 생활 속에서 실천할 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그럼요, 다양한 삶을 경험하려 노력하며 최대한 현재를 살아가는 거예요. 매 순간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요. 오늘은 제가 일하면서 느낀 점을 나눠볼까 해요. 지난 몇 년 동안 상담을 하면서 비슷한 유형의 인생 승자들을 여럿 만나보았답니다. 이분들이 공통으로 보여준 인식의 패턴은 이랬어요. 무조건 노력할 목표를 찾아내야 하고, 적극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하며, 효율적이어야 하죠. 부정적인 감정이나 가라앉는 기분이 끼어들어서는 안 돼요. 그건 시간 낭비나 마찬가지죠. 운동과 일은 당연히 매우 중요하고요. 이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인생도 통제할 수 있고, 행복에도 기술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즐거움과 행복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와야지, 화려한 명품을 걸치는 것쯤으로 여기면 안 돼요. 그러면 아무리 외부의 인정을 받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해도 내면의 평화를 잃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내담자는 8번의 상담 치료를 끝까지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이런 피드백을 주었다.

심리상담은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었어요. 덕분에 제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이제는 삶에 더욱 밀착된 인생을 살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어요. 어제 저녁에는 동문회도 참가했어요. 예전에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죠. 그리고동문회에서 여자 후배 한 명을 알게 되었어요. 큰맘 먹고 연락처도 달라고 했고요. 다음 주에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할 건데, 너무 긴장되네요.”

 

괜찮아요. 제가 팁을 알려드릴게요. 심리학의 인지 치료 요법 중 하나인데, 빠르게 긴장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랍니다. 긴장이 되면 일단 10초 정도 숨을 깊이 들이마셔요. 그리고 10초간 호흡을 멈췄다가 10초 동안 천천히 숨을 내뱉는 거예요. 이런 호흡 골든 트라이앵글을 10회 반복하면 대뇌에 충분한 산소가 공급돼서 평소 감정을 되찾을 수 있어요. 데이트는 즐거워야겠죠? 지금의 즐거움을 나누는 방법을 배워보세요. 앞으로 불안이 삶의 부담으로 느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상담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잠시 공유할까 한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아니다. 인생에는 더 많은 즐거움이 담겨 있는데,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만 매몰되면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게 될 것이다. 결과에 집중하기보다는 과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더 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Dr. Yin의 심리상담 TIP

 

불안을 개선하고 싶다면,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기보다 일단 불안한 상태를 인정한 다음, 불안을 야기하는 이유를 내면에서 찾아보기 바랍니다.

 

숨 막히는 효율로 자신을 얽매지 말고, 삶에 여유를 가지세요.

 

매일 최소 15분은 자신의 감정과 대화하고 연결하는 데 할애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세요. ‘오늘은 기분이 어땠지? 어떤 경험을 했더라?’ 여기서 포인트는 자신이 경험한 세부적인 내용과 과정이니, 작은 실수 때문에 자책하지 마세요. 그리고 최고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긴장될 때는 호흡 골든 트라이앵글법을 몇 차례 반복해 보세요.

 

CHAPTER 2. 감정은 포용이 필요하다

 

만인의 평가로 늘 눈치를 보는 여성 _ 수치심이 삶을 통제하게 두지 마라

혹시 살면서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실망할까 봐 항상 불안하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억지로 타협하는 일이 잦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잠재의식에서 수치심이 작동 중일 수 있다. 심리학에서 수치심은 자기인식에 속한다. ‘자기인식이란 일반적으로 스스로 타인과 다르다고 인식하는 감정을 뜻하며, 간혹 자부심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치심, 부끄러움, 질투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포함한다. 우울증, 초조함, 섭식 장애 등 정신질환의 여러 증상이 수치심에서 비롯될 만큼 수치심으로 인한 영향은 부정적인 감정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오래 지속된다.

 

예전에 인도계 영국 이민 2세대 내담자와 상담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세련되고 일 처리가 능숙했으며, 높은 업무 효율과 뛰어난 능력으로 서른이 되기도 전에 금융회사의 고위 세일즈 매니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추진력을 칭찬하는 한편, 전도유망한 사람이 인품까지 훌륭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상담을 의뢰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 훌륭함때문이었다.

 

상담 첫날,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조차 세심하게 연습한 듯 온화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오랜 상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녀처럼 완벽한 사람은 대개 과도한 긴장감과 관련된 문제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상담실에 들어온 그녀는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앉은 자세만으로도 나는 확신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여기서는 편하게 계셔도 돼요. 저는 당신을 평가하지 않는답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사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너무 긴장되고 강압적으로 보이시나요?”

솔직히 제겐 긴장하신 모습만 보이는데, 어째서 본인이 강압적이라고 느끼시는 거죠?”

저희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해요. 다른 팀의 매니저들도 제가 너무 강압적이어서 협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그러고요. 사실 저희 팀은 엄청난 실적 압박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 실적을 채우려면 사람들의 사정을 다 봐줄 수가 없죠. 그런데 저는 또 이 상황들이 불안하고요.”

나는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 “원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부드러운 여상사가 되고 싶었군요?”

맞아요! 전 직원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그런데 저희 업계는 경쟁이 정말 치열하거든요. 승진하기 위해서는 더 단호하고, 더 적극적이어야 하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쁠까 봐 걱정이에요. 정말이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저는 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아시다시피 그건 굉장히 높은 기준이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이 있고, 그 잣대 또한 다 다르니까요.”

맞아요. 그런데 인도의 문화에서 여성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거든요. 저희 부모님도 업무 능력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죠. 어릴 때부터 네 주장을 너무 내세우지 마라, 그러면 사람들이 널 싫어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다들 널 좋아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말씀을 듣다 보니, 깊은 수치심과 낙담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네요. 어릴 때부터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만이 여자로서 최고의 미덕이라고 배워왔고, 또한 그것이 부모님께 인정받는 가장 익숙하고 빠른 길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지금 스스로 노력하고 분투해서 승진의 기회를 잡았는데도 본인의 강인함과 결단력 때문에 오히려 인정받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거죠. 그래서 수치심을 느끼는 거고요.”

 

나의 분석을 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나의 기대와 타인의 기대가 상응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여성은 사회로부터 타인을 배려하고 친절하며 온화한 역할을 기대받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성취감을 느낄 때 자신의 역할과 타인의 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박사님. 제가 생각해도 저는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어요. 최연소 고위 매니저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성과가 부정적인 평가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더 큰 수치심이 들어요. 제가 거둔 성과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될 만큼요.”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주입된 모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라는 가치관, 그리고 성장한 뒤에 형성된 가치관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대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업무적 성과와 회사에서 분투했던 노력이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요소가 될 거라는 생각에 더욱 초조해졌고, 자신이 이룬 성취까지 부끄러워진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수치심이 가득한 자아가 살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에 맞추는 것만 기억하고 자신은 잊어버린 자아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수치심이 이렇게 큰 위력을 가지게 된 이유가 가장 부정적인 감정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은 수치심이 들면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이 불편한 기분을 회피하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우리의 본능 중 하나인 이익 추구와 위험 회피형 방어 기제로 해석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문제를 회피할수록 초조함과 우울감이 더 쉽게 유발되며, 이는 수치심이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치심의 또 다른 부작용에는 자기 배척, 자기 비하,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 그리고 자기 이미지 부정 등이 포함되고, 장기간 수치심에 시달리면 우리는 자신의 장점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수치심에 상처받을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부족하고, 쓸모없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런 기분이 들면 지나친 수치심으로 자신의 장점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수치심이 형성되는 원리를 이해하면 성장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만족과 격려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부정적이고 비하가 섞인 피드백을 많이 받으면 서서히 자신에게 실망하다가 결국 자기 비하와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다른 집 애들은과 같은 비교가 좌절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수치심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타인과의 비교는 사실 유리와 다이아몬드를 비교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다른 사람의 화려한 외모와 비교하다 보니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는 동안은 자신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실수와 성취는 똑같이 중요하고, 실수도 우리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해야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삶이 더 수월해지고, 삶이 수월해지면 자기인식을 더 정확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수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빛을 볼 수 있어야 이번 사례의 내담자처럼 내면에서부터 강해져 수치심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CHAPTER 3. 스스로 든든한 버팀목 되기

 

늘 모든 것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남성 _ 변화하는 일상, 그것이 삶이다

심리학과 심리상담은 수많은 데이터와 사례 연구에 기반한 사회과학에 속한다. 어느 분야나 무대 위에서의 10분을 위해 무대 밑에서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중에서도 심리치료 과정은 특히나 느리고 힘겹게 진행되기 때문에 심리상담에는 어떠한 지름길도 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한 내담자의 덕이 컸다.

 

영국 의료체계는 박사 학위 취득 후 3년 동안 공립병원에서 3년 이상 근무해야 사립 상담실 지원 자격을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 공립병원의 심리상담센터는 언제나 수요 과다 공급 부족상태의 압박을 겪고 있어서 신규 박사 졸업생은 쏟아지는 대기 환자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영국에서는 국민 모두가 매년 12~15회의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증상이 심각한 경우 상담 기간이 연장되기도 한다. 심리상담 수요는 기존 병원 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환자 대기 시간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담자는 평균 3개월에서 6개월가량 대기하고, 일부 빈곤 지역의 대기 기간은 1년을 넘어서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가장 낙후한 지역에 있는 병원의, 가장 낙후한 심리상담부서에 배치되었다.

 

이번 사례의 내담자는 진눈깨비가 촘촘히 내리던 런던의 가장 추운 날, 상담을 하러 왔다. 나는 한기 가득한 상담실에서 작은 전기히터에 의지한 채 덜덜 떨며 차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아프리카계 영국 남성이 들어왔다. 나는 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도 66세라는 숫자와 눈앞의 건장한 이 남성을 매치할 수 없었다. 차트를 꼼꼼히 다시 살펴보았다.

* 아프리카계 남성, 66/ * 전립선암 환자 / * 암 재발로 인한 우울증 / * 치료 대기 시간, 1

 

아무리 봐도 차트에 기록된 그 어떠한 정보도 내 앞에 있는 사람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한겨울이었는데도 그는 얇은 옷차림이었다. 외투를 벗자 타이트한 운동복 위로 몸의 근육과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무료 상담을 1년이나 기다린 그가 자기소개를 마치는 대로 시스템의 불공평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거나, 곧바로 자신의 증상을 들어달라고 호소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아주 차분하게 나를 가늠하고 있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리상담 중 갑자기 조용해지는 이 시간을 치료 중 정지라고 부르며, 이런 정지의 시간은 흔히 볼 수 있다.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보여주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저항의 벽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 보호 기제 중 하나이다.

 

마침내 그가 긴 침묵을 깨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중국인이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리샤오룽(이소룡)을 아시오? 내가 굉장한 팬이거든요. 그를 따라 영춘권도 몇 년이나 배우고, 공수도는 검은 띠까지 따고 세계 챔피언 자리에도 올랐죠.”

!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시다시피 저는 암 환자입니다. 한 차례 수술도 받았지만 재발했고, 지금은 두 번째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지요. 암세포와 함께 힘과 통제력도 제거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매일 6시간씩 운동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남자가 아닌 것만 같아요.”

 

전립선암 수술을 하면 회복 과정에서 소변줄을 껴야 하고 성욕이 감퇴한다. 이는 남성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우울증도 유발할 수 있다.

그를 위로하려고 하자 그가 갑자기 도발적인 말투로 물었다.

이미 이 지경이 됐는데, 당신이 뭘 더 해 줄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신중히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했다.

함께해 드릴 수 있어요.”

 

그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해 위로하며 도와주는 것 말고,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이런 사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줄 수는 없지만, 그와 동행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함께한다는 것, 동행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인격 이론에서 동행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칼 로저스의 인격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는 위로 향하려는 기운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로저스는 충분한 애정과 동행이 있는 환경에서 우리의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는 상대적으로 조화롭게 발전하고, 비교적 쉽게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언급한 자아실현이란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을 대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자신의 감정을 믿고 존중해, 깊은 공감 능력을 갖추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반대로, 충분한 애정과 동행, 그리고 존중이 결여된 환경에서는 우리의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간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여 여러 심리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나의 대답에 내담자가 물었다.

확실합니까? 쉽지 않은 길이 될 텐데요?”

제가 그 길을 함께 걷게 해 주시겠어요? 제게 영광이 될 것 같은데요?”

 

그 뒤로 이어진 몇 차례의 상담에서 나는 그의 과거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가 무술을 배운 이유는 폭력성이 짙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는 7살 때 아버지로부터 손찌검을 당했다. 사회복지기관이 개입하고 난 뒤에야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데려간 위탁가정에서 더 큰 상처를 입었다.

 

상담 중 그가 내게 말했다.

잠들기 전에 모든 문과 창문을 잠그는 습관이 있어요. 그리고 베개 밑에는 항상 작은 칼을 두죠. 저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제가 충분히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병에 걸려버렸지 뭡니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히 싸워왔다. 그러면서 과거에 분노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불만이 쌓여 우울증이 생긴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오셨네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젠 치열하게 싸우지 않아도 되잖아요?”

내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리는가 싶더니, 묵묵히 한 마디를 반복했다.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되는군요. 싸우지 않아도 돼요.”

이윽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와 15회의 상담을 진행하고 나자 그가 말했다.

아무한테도 제 과거를 말한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 제 과거를 들으면 나약하다고 비웃을 것 같았거든요. 저는 싸워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적어도 단 한 사람만큼은 과거로 저를 평가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니요, 최소한 두 사람이죠. 절대 자기 자신을 잊지 마세요.”

 

상담이 마무리된 후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마지막 상담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이 동행해 주신 덕분에 제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부터 저도 저 자신과 잘 동행해 보겠습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있다. 인생이라는 길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처럼 힘들고 고되지만, 치유나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면의 즐거움을 갈망하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무조건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고, 동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는 심리학에서 효과가 입증된 내면의 트라우마 치유 방법 중 하나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현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당신이 과거에 받은 고통을 이해하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를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이겨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당신이 이겨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동행하는 것뿐이다. 나를 통해 당신은 자신이 걸어온 길의 어려움을 보고, 자신의 힘을 느끼며,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며, 자기 내면과 외면을 점차 일치시켜 갈 수 있다.

 

공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무수히 많은 카드와 꽃, 초콜릿, 내담자가 그린 그림, 편지 그리고 내담자의 칭찬을 받았다. 이 경험이 내게 정말 중요한 이유는, 상담사라는 직업 및 박사 학위에 대한 나의 자만심을 내려놓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나는 나의 한계를 목격했고, 타인의 어려움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을 통감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내심과 동행이 가지는 치유의 힘을 절실히 체감했다. 또한, 내담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고,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그들의 용기에 탄복했다. 사실 그들이 가장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들 스스로가 치료를 통해 계속 살아갈 용기를 찾고 치유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자아를 찾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관심, 그리고 사랑이다. 힘든 길이지만 절대 마음의 가로등을 꺼뜨리면 안 된다. 칼 로저스는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은 종점이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했다.

 

CHAPTER 4.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 배우기

 

서로 다른 애착 관계로 상처 주는 부부 _ 이해하지 못해 사랑하고, 이해하기에 헤어진다

겨울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와 숨 막히는 상담실 분위기가 꼭 닮은 날이었다. 오늘의 내담자는 결혼생활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상담을 받으러 온 한 부부였다.

 

부인은 남편이 어떻게 자신과의 대화를 거부하는지 성토하며 격앙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남편은 이런 상황을 하도 겪어서 이미 익숙해진 듯, 미동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모습이 상담에 건성으로 임하는 느낌을 주었다. 부부 상담에서는 과도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한쪽을 진정시키는 한편,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쪽에게는 속마음을 얘기해달라고 타일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보통 각각 3분씩 말할 기회를 부여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는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결혼 10년 차로, 쾌활한 성격의 부인과 성숙하고 진중한 남편이 서로의 성격에 반해 연애 기간을 1년도 채우지 않고 결혼에 골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에게는 두 아이가 생겼고, 달콤하고 로맨틱해야 할 신혼이 정신없는 양육의 시간으로 변하는 데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여러분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다.

부인이 잔뜩 화가 나서 이야기를 한다.

왜 제대로 말을 안 하는 건데? 당신만 바쁘고, 난 안 바빠? 일 핑계만 댈 줄 알았지, 당신이 애들을 제대로 본 적이나 있어? 맨날 내 말을 무시하는 것도 명백한 감정 폭력이야!”

이에 남편도 지친 듯이 대꾸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잖아? 맨날 퇴근해서 집에 와도 당신은 싸울 생각뿐이지? 나도 정말 피곤하다고.”

그건 당신이 우리 문제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내가 당신이랑 잘 얘기해 보려고 하면, 맨날 피곤하다며 날 무시했잖아! 내 감정은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한 거라고!”

그래, 당신이 생각 안 한 거라고 하면, 안 한 거겠지. 어차피 내가 당신 생각을 바꿀 수도 없잖아? 마음대로 해, 당신 바가지 긁는 소리도 이제 지겨우니까.”

 

부부의 소통 방식은 아예 다른 주파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인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감정의 가치, 경청과 이해지만, 남편은 그럴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이들은 서로를 갉아먹으며 마지막 열정 한 방울마저 소진해 버렸다. 이 부부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각자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심리상담이 대형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한다. 성장 과정과 삶의 조각을 하나씩 모아 마음 지도를 만들다 보면 대부분은 그 사람이 가진 감정 패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지금의 갈등을 겪게 된 데도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다. 부인은 비교적 안전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는 안정적이며 온화한 대화를 나누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 부부간의 일상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성장했다. 반면, 남편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는 일찍 이혼하고 각자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는 두 가정 사이에서 겉돌았다. 그가 성숙하고 침착하게 행동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자격이 없다고 여긴 그는 진심을 억누르는 데에 익숙했다.

 

그렇다면 이 행동의 차이는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현대 정신분석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애착 이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다년간의 상담 경험을 통해 유년 시절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유아와 어머니(또는 주 양육자) 간의 관계는 앞으로 마주할 친밀한 관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애착 이론은 또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크게 안전형 애착 관계, 불안형 애착 관계, 회피형 애착 관계, 혼란형 애착 관계로 구분한다.

 

이 사례의 부인은 안전형 애착 관계에 속한다. 안전형 애착 관계는 유아와 어머니의 관계가 안전하고 양호하다. 자녀는 양육자가 자신의 필요를 알고 돌봐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부모라는 안전한 요새안에서 안심하고 대담하게 세상을 탐색한다. 이번 사례 속 부인의 성장 환경도 꼭 이랬을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가 긍정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온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부의 원활한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남편과의 냉전이 끝없이 펼쳐지자 결국 인내심을 잃었고, 남편의 회피와 외면에 지쳐갔다.

 

반면 남편은 회피형 애착 관계에 속한다. 이 유형에서 자녀는 낯선 사람과 양육자에게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이 유형의 아이는 누가 자신을 데리고 있든지 주변 환경을 탐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환경 속에 누가 들어오든 크게 분노하지도 않는다. 이런 유형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어머니 또는 주 양육자의 인내심 부족, 자녀에 대해 세심하지 않은 반응, 부정적인 반응, 신체 접촉 거부 등이 주요 원인이다. 회피형 애착 관계가 형성된 유아는 위축된 모습을 주로 보인다. 성인이 된 후에도 비교적 냉담한 성격, 주변에 대한 흥미 부족, 교우 관계의 어려움 등의 문제를 겪으며, 마찰이 생긴 경우에는 대부분 회피, 냉전 또는 침묵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애착 이론을 바탕으로 나는 남편이 소통 능력과 소통 의사가 부족한 이유를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두 가정 사이를 떠돌며 외부인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따뜻함과 친밀한 감정을 받아본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상담 중 소통은 곧 말싸움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언쟁과 마찰을 싫어하고 혐오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대화하자는 부인의 요구가 그에게는 어린 시절 불행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회사에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싫은 일도 억지로 떠맡았다. 그는 또한 자신이 가족 부양의 소임을 다하고 있으며, 귀가 후에는 싸움이 아닌 자신만의 휴식을 기대한다고 했다.

 

부부 상담에서 상담사의 첫 번째 목표는 서로의 소통 루트를 열어주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소통 루트가 심각하게 단절된 경우, 원활한 소통을 위해 상담사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때 나의 역할은 그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진짜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줌으로써 부부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때 내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이 아닌 글로 소통하게끔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써야 하는 문자는 그만큼 공격성이 덜하고, 서로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담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간 그들의 결혼생활은 이미 깊이 뿌리내린 성장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그동안 윤활제 역할을 해 주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 효력을 잃자 결국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협의 이혼을 통해 서로를 놓아주기로 했다. 더 이상 가정과 애정이라는 명목으로 서로의 내면을 속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상담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소통 방식을 조율하여 그들이 서로의 성장 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다. 결혼생활의 방향성은 심리상담으로 정할 수 없으며, 변화는 내담자 본인들의 강력한 의지로 끌어내야 한다. 이 부부의 경우, 상대를 향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데다 성장 환경의 영향이 너무 깊은 탓에 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려웠다.

 

이 상담을 통해 내가 깨달은 바는, 부부 상담 끝에 헤어지기로 결정하는 부부는 대체로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 또한 성장과 사랑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존중하는 것이며, 서로에게 맞추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후에는 서로 놓아주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렇듯 연애나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서로의 성장 배경과 소통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혼하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는 대신, 지금 보이는 결점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노력에 감사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은 뜨겁지만, 결혼은 지속된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니 상대방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은 버려야 한다. 누구나 변화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이어져야 하며, 당신의 변화도 당신의 내면에서 비롯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