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자가 되는 편이 나은 까닭
우리는 지켜지지도 않는 거창한 약속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제도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그 어떠한 제도도 우리를 곤궁에서 구해주지 않는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왜일까? 모든 인간은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다. 또한 삶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 제대로 적용하는 법은 배운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랑, 우정, 공정함, 정직, 이해심, 상호존중의 미덕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자기 자신을 생각하라는 요구만으로도 죄책감을 갖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모두가 이기주의자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고.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신경을 쓰면 불행한 사람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아울러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남을 동정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다. 또한 자신의 소망과 목표, 진정한 욕구와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은 개개인의 소중한 권리이자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의무이다.
의식적이고 철저하게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요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남들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 갑자기 옳은 것이라니? 이 같은 의혹의 뿌리에는 한 가지 미심쩍은 사실이 자리해 있다. 즉 이기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켜 준 사람들이 바로 ‘타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겨 우리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하게끔 만들려고 했다. 이제 남들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을 세워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이기주의자로 사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기주의자가 되면 지금까지의 직업, 백해무익한 몇몇 친구들, 혹은 배우자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깨닫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게 있고,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실행하되, 남들이 좋아할지 말 지에 대해 수천 번씩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세계에 순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얽매여 살아간다. 공동체 안에서만 자신의 삶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성원들 각각은 단 한 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다. 그 목표란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위해 가능한 더 많은 행복과 만족과 자아계발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남들과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들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능한 많은 것을 얻으려는 이런 공동생활의 자연스런 생존게임 하에서는 자기 뜻을 관철시킬 줄 모르는 사람들은 낙오되고 만다.
“우리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남들을 배려하라‘, ’남을 도와야 너도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미루어라‘ 등의 격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복종시키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들이 약속한 평화, 화합, 안정, 행복 등 우리가 동경하는 것들 중에 지켜진 게 과연 있기는 한가? 우리는 냉철하게 다음 사실들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들만 배려하는 사람이 이용당한다는 것을, 양보심은 약점으로 둔갑해 남들이 자신을 이용해 먹도록 만든다는 것을,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뿐더러 설혹 그런 사람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키려는 계산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결론은 명백하다. 공동체가 개인을 희생시켜 얻어내는 이득이란 바로 몇몇 사람만을 위한 이득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공동체는 피하기 어려운 울타리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내 이익보다 우선하여 남들에게 유익한 희생을 치르겠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내 이익을 우선하겠는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것을 뜻한다. 나의 진정한 소망과 욕구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고 그런 소망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제에 나 자신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남들이 원하는 것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에 더 많이 전념한다는 것을 뜻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남들의 이익을 위해 힘을 쏟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와 그 규범에 순응하고 요구받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역할에서 빠져 나오면 즉시 박탈당할 수 있는 한시적인 안정일 뿐이다.
남들이 나를 위해 남겨둔 것보다 내 재량에 맡겨진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애쓰는 소수의 사람들과 달리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알아보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물에는 애초부터 주변 세계가 세워 놓은 장애물과,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속에 세워진 장애물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순순히 따르는 순종하며 복종하라는 가르침, 틀에 박힌 행동규범, 도덕적 상투 문구들, 여태까지 쌓아 온 위신과 안정, 그리고 자칫 남들로부터 인정받던 삶이 흔들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끝없는 두려움이 바로 자신 속의 장애물이다.
대리만족에 머무른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어떤 소망이든 사람들은 충족되기를 갈구한다. 또한 그 소망이 이루어지면 행복감을 느낀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나중에 얻게 되는 자신감 또한 더욱 커진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은 소망은 자신감과 일의 성취 능력을 축소시킨다. 이것은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자기 내면의 지지기반은 줄어들게 된다는 말이다.
소망을 포기하면 당연히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할뿐더러 그 소망이 불러일으킨 긴장감만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바로 이것!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긴장감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될까? 긴장이 해소될 수 없다면 우리는 대리만족이나, 혹은 자기합리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소망을 포기할 때 그럴듯한 변명이나 보상책을 찾기 위해 상상력을 발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면에 매우 조예가 깊다. 그들은 변명이나 보상책을 찾기 위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과 에너지의 몇 배를 더 동원한다.
만족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세계로 도피하는 예는 흔한 일이다. 가령 어떤 사람은 실로 이루지 못한 것을 남들 앞에서는 이루었다고 떠벌린다. 실제 만족을 얻지 못하는 대신, 적어도 주위 사람들한테는 찬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찬사를 들은 거라고 짐작되는 뭔가를 그럴싸하게 해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대리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상세계가 언제고 한 번은 폭로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상의 만족은 대부분 그리 오래가지는 않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경우 간혹 의학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항상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남들을 생각하라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 먼저 생각하라는 것은 아주 싱거운 말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구상으로 만들어 그 구상에 따라 살아가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매번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소망과 현실간의 끊임없는 타협의 산물이다. 이때 그 타협으로부터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끌어내는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심리적 장애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성실, 정직, 연대감,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이기주의를 하나의 구상으로 만들고자 할 때, 바로 이런 개념들이 장애가 된다. 모두들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그런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한다. 어릴 때부터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이때 그런 비난이나 그 비슷한 비난들을 여과할 수 있는 구상이 없다면 계속 불안해질 뿐이다. 누구에게나 평이 좋은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이런 식으로 불리한 타협을 맺는다면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서 멀어질 뿐이다. 결국 자기는 친절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만족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성실을 살펴보자. 성실하게 살면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과 기회를 희생시킨 것에 대해 보상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에게 순응하는 동안에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이다. 누군가 성실 운운하며 내게 접근해 온다는 것은 바로 거기서 어떤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연대감이나 정직을 요구해 올 경우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이 자기 인생을 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들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는, 그런 너무나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남들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일은 남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소망과 목적을 희생시키는 것을 막아 주는 지속적인 안정장치를 세우는 것뿐이다.
언제나 우선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거리낌없이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대신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과정은 이런 안정장치 중의 하나이다.
항상 남들만 배려하는 대신, 남들을 나에게 익숙하게 만들어라
몇 년 전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낼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때로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바쁘게 돈 버는 일에만 여념이 없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볼 시간조차 내지 못했다. 당시 건강도 나빠서 위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고 의사는 내게 심장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한 시간씩 나에 대해서만 몰두하자!’라고 결심했다. 나는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고 『기 관리 기술』이나 『자율성 훈련법』 『궁술에서의 선(禪)』과 같은 책을 읽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15분 체조 후에 냉온수로 번갈아 목욕을 하기도 했다. 자율성 훈련 때는 아예 눈을 감고 미동도 않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한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내게 불만을 보였지만 그 구상이 보여준 일련의 결과들 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자율성 훈련을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났을 즈음, 나는 그 동안 가슴과 위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차츰 나머지 가족들도 나의 완강한 태도로부터 이런 저런 유익한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의 기대에 맞추느라 나의 이기적인 아침 프로그램을 끝까지 관철하지 않았다면, 또한 내가 그 전에 가족에게 주었던 이미지를 고려했더라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이 서두르는 착실하고 부지런한 가장의 이미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항상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가장의 이미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잊고 이제 그들에게 솔직히 말하라.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게 죽음으로 내몰아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요컨대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위해 단 하나의 올바른 구상을 확정하고, ‘오늘부터 나의 이 구상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라는 결심을 굳혀라.
단지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 연민이 증오로 변해 버린 어느 여자의 이야기
친구와 친척, 상사와 부하, 그밖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쨌든 “그 사람은 적이 없어. 모두에게 인기가 좋아.”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형식적이나마 최고의 찬사가 된 것은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남을 잘 도와준다’, ‘상냥하다’라는 얘기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특성들이 주위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남에게 조종당하기가 쉽다. 또한 쉽사리 겁을 먹는 유형이다. 그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대신 차라리 양보하는 편을 택한다. 결국 평이 좋기를 바라고, 또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굴복시키기, 서서히 침투하기, 유혹하기의 호락호락한 희생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남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희생을 감수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보호와 안전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찾을 확률이 가장 적은 곳, 즉 남들에게서 그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나 할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고 또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은 정작 자기 자신에게서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점령해 버렸다. 이런 사람들을 보통 ‘희생적인 군중’ 또는 ‘수동적인 다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이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들은 개체로서가 아니라 양으로 계산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희생만 있을 뿐, 자신만의 인생관이나 자기 영역은 없다.
바지를 사려고 옷가게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물건을 고르지 못하고 뒤적이고 있자 점원이 와서 바지를 하나 골라 주며 말했다. “이것이 손님이 찾으시는 그 바지 같습니다.” 입어보니 정말 잘 맞았다. 그러나 통이 좀 넓었다. 점원에게 얘기했더니 점원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옷입니다. 자기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즘 그런 바지는 입는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누군가가 유혹하기 방법으로 내 영역을 침입해 들어오려고 한다. 물론 전혀 악의가 없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기꺼이 순응하는 다수의 대중에 속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지키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상황이다. 점원의 말에 넘어갔다면 그는 빨리 바지를 팔고 나를 떨쳐버릴 수 있다. 물론 그는 내가 그 바지를 정말 마음에 들어할지 아닐지는 관심도 없다.
이외에도 순전히 상대방의 호의 때문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는 부메랑처럼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나를 어려움에 빠뜨릴 것이다. 더 나아가 양보를 할 때마다 상대방은 다음 번에는 내게서 더 많은 것을 양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면 일단 거절했을 때 발생하는 긴장상태는 피할 수 있고, 양보하면 언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튼 희망을 품지 마라. 일단 내가 그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상대는 그것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부인은 약 10년 전에 남편의 어머니를 받아들였다. 노후를 양로원에서 보내게 할 수 없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동의했다. 자기도 실제로 그렇게 확신해서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고 시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이런 마음은 증오로 변했다. 이 세 사람이 서로에게 애써 가식적으로 대하면서 살아온 세월 동안, 이 증오심은 꺼질 줄 몰랐고, 세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을 받아준 게 고맙고 또 자신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사사건건 모든 일에 끼여들었고, 밤에 부부의 침실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즉시 그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 있니? 도와줄까? 혹시 싸웠니?”
며느리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지만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친절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양보하는 데 익숙해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욕구불만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때로 전시용의 위장된 호의를 내보이곤 한다. 그리곤 친구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끔찍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만 되면 나는 내 집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거 아냐.”
자기 영역을 성공적으로 지키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전제조건
우리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모순된 교육을 받아 왔다. 충분히 여유를 두고 참된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세워 나가며 남들에 대해 진실한 배려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그렇게 모순된 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정체되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역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기서 놓쳐버린 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두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을 갖춰야 한다.
① 방어자세
자기 영역과 자신의 인생 구상을 세워나가고 싶은 사람은 다음 우편배달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남자의 직업은 우편배달부이다. 그는 봉급이 너무 적어서 남들처럼 물질적인 부를 누릴 여유가 없었지만 어떤 사람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이유는 뭔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벼룩에 광적인 관심이 있었다. 사실 그는 유럽의 정평 있는 벼룩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다. 구소련의 자연과학자까지 그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다.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회의에 초대된 적도 있었다. 이 남자는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어느 날 자신이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전문가들 앞에서 더욱 당당하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어학코스를 최단기간 안에 힘들이지 않고 마쳤다. 우편배달부가 어떻게 그 어려운 라틴어를 단기간에 마스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목표를 철두철미하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복의 본질적인 부분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류학자 로버트 안드레이가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예기치 않은 힘을 낼 수 있으며, 그래서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적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말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어”, “한번 해보지 뭐, 안되면 그만이고.”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에서도 자신과의 일체감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굴복시키기나 서서히 침투하기, 또는 유혹하기의 방법에 대해 자신을 방어할 수조차 없다.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만이 이에 대해 의식적으로 철두철미하게 방어자세를 취할 수 있다.
② 포기할 각오
자기만의 영역을 경계 짓고 그것을 지킬 결심이 섰다 해도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다른 것들이 수천 가지는 될 것이다. 이런 유혹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해도 내일, 일을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끊임없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적들이 여러 가지를 들이대며 유혹한다.
여기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서 항상 반 정도밖에 이루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반이라는 것은 전혀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적어도 처음에는 이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한 명의 새 친구를 만들기 전에 열 명의 불필요한 친구를 떨쳐 버려라
“매일 한 사람씩 사귀어, 그를 네 친구로 만들어라!”라는 격언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격언을 따를 것이다. 그대로 일이 잘 풀리면 그 사람은 일년 후에 365명의 친구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일 각각의 친구에게서 또 다른 친구 한 명씩이 추가로 생길 것이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잊혀지지 않도록 그중 한 명과 매일 식사하러 가야 한다. 저녁에는 거꾸로 잊혀지고 싶지 않은 좋은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둔다.
그러나 이렇게 한 해를 보내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릴 것이다. ‘새 친구를 얻기 전에 불필요한 열 친구를 떨쳐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고상한 우정이라는 전혀 비현실적인 관념은 수많은 사람들을 순진함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환상이다. 위대하고 순수한 사랑에 대한 동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개념들과 관련해서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되는가?”라고 냉철하게 질문하는 것을 매우 부도덕하게 여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 두겠다. 즐거움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몇몇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정에 바탕을 둔 이런 관계들의 가치를 살펴보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너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라거나 “네가 진정한 친구라면, 나에게 그런 해를 입히지는 않겠지.”라는 경고로 나를 계속 성가시게 한다면, 그는 나를 협박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위해 무조건 사랑을 주거나 친구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그 관계의 이익에 대해 따져 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만약 따지고 든다면 이 관계에서 내가 받는 것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나의 그런 생각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내가 그 의미를 캐묻지 않고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성실, 정직, 찬사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우정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작기구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든 가설이든, 사실 감정만으로는 만족스러운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실망을 거듭하여 괴로워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랑하거나 친한 누군가가 나에게 의지할 수는 있지만, 나는 상대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내게 짐이 될 것이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피해가 생기기 전에 끝내는 게 좋다. 이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하는 희망에 의지하는 그런 일방적인 감정적 결속의 종말은 훨씬 더 냉정하다. 급부와 반대급부의 조화 없이는 사랑도 우정도 지속될 수 없다.
자기 자신보다 다른 누구를 더 존경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아 온 교육에 의하면 가급적 모든 것에 대해 존경을 표해야 한다. 권위에 대한 존경, 어떤 분야에서 우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 직책, 상사, 권력, 돈에 대한 존경.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같은 굴복의 의식에 지배당하고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득을 취한다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현실은 끊임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굴복시키려 하는 체제이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경험에 의하면 어떤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도 또 다시 같은 법칙이 생겨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체제는 존속한다. 여기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단지 남들이 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나의 이득을 넘겨주느냐, 아니면 적어도 그들과 대결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요컨대 문제는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고 보다 더 신중하게 처신할수록, 겉으로는 막강해 보이는 상대에서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더 확보하고 이용할 수 있다. 자기 영역의 경계를 긋지 않은 사람은 불안한 심정으로 항상 상대에게 굴복함으로써 적어도 최소한의 이익을 확보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상대가 어떤 정류의 권위를 요구하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누구에게든 동등한 파트너이며 어떠한 굴복의 의식에 의해서도 위협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막아 줄 수 있는 원칙이다.
또 하나의 원칙은 ‘어떤 영역에서 유일한 권위자라고 하면서 내게 제공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다른 대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존경해 오던 것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고, ‘내가 그 대신 동등한 가치를 가진 대안이나 보다 나은 대안을 찾는다면 아무에게도 종속될 필요가 없다. 나는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마지막 원칙은 ‘나는 포괄적인 정보를 통해 권위를 갖고 나를 굴복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주위를 존경으로 둘러싸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권위가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이 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대를 무식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때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고, 단지 어떤 분야에서 자기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는 제스처를 보내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무식한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교육을 받았든 상관없이, 치과의사에게 내 치아를 치료하기 전에 X-레이 사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이, 자기 자신은 지나치게 적게 존경한다. 이로 인해 불행과 불만족이 발생한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개개인의 단호한 자기 주장의 혁명이다. 이보다 나 자신에게 유리한 호전적인 혁명은 없기 때문이다. 남의 계발을 위한 최적의 전제조건들을 조성해 주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의 계발은 스스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 혁명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절대로 그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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