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피바다
전반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화면에 뜬 번호를 보니 병원에서 온 전화다. 나는 전반전 내내 축구장을 뛰어다니는 어린 아들의 금발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긴급 전화가 온 지금, 나는 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동료 의사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프리들 박사님. 소생실입니다. 칼에 찔린 부상자가 병원으로 오는 중이에요. 구급대원 말로는 칼이 아직 가슴에 꽂혀 있대요. 구급차를 타고 오고 있어요. 안개가 심해서 헬기를 띄울 수가 없다네요. 환자는 심각한 출혈성 쇼크 상태이고, 우리에게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중입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지금 출발할게요. 환자가 살아서 도착하면 곧바로 심장 수술실로 올려주세요.” 이런 환자는 응급실에서 CT를 찍어 포괄적 진단을 내릴 시간이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생명을 위협하는 출혈을 멈추려면 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바로 나와 내 팀.
아드레날린: 환자와 얼추 비슷한 시간에 나는 병원에 들어섰다. 환자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20대 중반의 이 남자는 수술대로 옮겨지는 내내 쉴 새 없이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반복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렇게 미안했을까? 피해자가 더 있었던 걸까? 어디에? 그 피해자는 죽었을까? 질문은 많고, 대답은 없다. 그는 뭔가 매우 중대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과 함께 그의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니, 세차게 흘러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양이 흘러나갔는지 그 순간에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당시 이 환자의 생명은 얕은 실개천처럼 겨우 흐르고 있었다. 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고, 호흡은 ‘여전히’ 얕고 가빴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협상이라도 하는 듯, 쉴 새 없이 뭔가를 말했다. 미국 유학 시절에 잠시 있었던 병원에서는 이 환자처럼 중상을 입은 사람을 “Talk and Die”, 즉 죽을 때까지 말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의사는 이것에 속으면 안 된다. 이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니, 그렇게 심각하진 않군.’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외상 전문가와 응급 의사들은 이 징조를 신체 시스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 신호로 해석한다. 대부분 심각한 사고나 폭력 범죄의 피해자인 과다 출혈 환자들은 쇼크 단계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그 순간에도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쇼크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한 방울씩 분비된다.
이때 아드레날린의 임무는, 남아 있는 피를 사용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심장과 뇌에 최소한의 응급 순환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기관의 혈액순환이 희생된다.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수축하여 혈액 공급을 최소화한다. 심하면 혈액 공급이 완전히 끊겨 기능이 점차 멎는다. 참고로 우리 인체의 가장 큰 기관인 피부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다. 피부는 차갑게 식어 눈처럼 하얗게 변하고, 땀이 얼음물로 바뀐다. 그런데 뇌로 들어가는 비상 회로 덕분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의식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자율성이 남아 있고,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다 출혈 환자들은 자발적으로 계속 말을 한다. 말을 하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삭이듯 단어를 뱉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이제 죽는 건가요?”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저는 하미트입니다.” “저는 프리들입니다.” 하미트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땀에 젖은 그의 손을 잠시 잡고 있다가 가볍게 움켜쥐며 말했다. “해낼 수 있습니다.”
피의 흔적
모든 생명은 피에서 시작된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우리는 태어나지 못하고, 여성은 임신하지 못한다. 참고로 다양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고유한 전문 기능을 담당하는 신체 부위를 우리는 기관이라고 부르는데, 피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 액체 기관이다. 피는 다른 모든 기관을 관통하여 흐르며 그것들을 연결해준다. 따라서 몸에 피가 흐르지 않으면, 순환도 혈압도 맥박도 없다. 당연히 혈액 수치도 없다. 거의 모든 병원 진료는 피검사로 시작된다. 의사의 진료 시간은 평균 7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피가 말해준다. 모든 진단의 60퍼센트가 혈액 수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의학은 혈액 수치를 철저히 점검하는데, 모든 기관과 작은 세포들마저도 피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전한다. 감염되었는지, 희귀 유전 질환이나 심장마비 또는 신장 질환이 있는지, 건강 상태가 양호한지, 세포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등등, 당신이 자각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의 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의사들은 피의 도움을 받아, 병을 예측하고 확인하고, 예측 범위를 좁히거나 폐기하고, 치료의 성공 여부를 점검한다.
한편 피에 정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피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피부는 혈액순환이 가장 잘되는 기관이기 때문에 피부는 쉽게 혈색을 드러내 우리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기분까지도 알려준다. 피부에 드러나는 혈색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아이의 발그스름한 볼은 생기 있어 보이고 대개는 실제로도 건강하다. 멍과 혈종은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심지어 학대를 받았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시뻘게진 얼굴은 혈압 상승을 알리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은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리고 피는 면역 체계의 액체 고속도로이고, 우리가 다치면 피는 즉시 응고하여 상처 부위를 봉쇄하려 한다. 피에 들어 있는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하는데, 산소가 없으면 심장은 뛰지 못하고 뇌는 생각하지 못한다. 또 혈액응고단백질과 혈소판 덕분에 우리는 출혈이 있더라도 즉시 사망하지는 않는다. 또 피에 들어 있는 백혈구는 치명적인 병원체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리고 큰 부상으로 아주 많은 피를 흘리면, 대개는 영혼도 같이 피를 흘린다. 이런 상처는 잘 아물지 않고 흉터가 깊게 남는다.
한편 우리의 언어에는 피, 의식, 영혼의 삼각관계를 이용한 관용어구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음 아픈 일이 발생하면, 영혼 또는 심장이 피를 흘린다고 표현한다. 뭔가에 강한 욕구가 생길 때, 피 맛을 봤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말하고, 지쳤을 때는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기분이 든다. 요리, 춤, 기계 수리 등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몸에는 그와 관련된 특별한 피가 흐를 것이다. 살다 보면 때때로 실패도 하여 출혈을 맛보기도 한다.
그리고 얼굴뿐 아니라 마음도 창백한 사람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지루하고 빈약한 글을 핏기 없는 글이라고도 부르며,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피를 가졌다고 말하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게 ‘피를 식히라고’ 조언한다. 아울러 피는 물보다 진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피가 부글부글 끓거나 굳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피는 심장에서 솟아오른다. 물이 샘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똑같다. 진화 측면에서 볼 때, 피와 심장은 한 기관이고, 기능 면에서 분리할 수 없는 동일체다. 그러므로 피는 언제나 심장의 피, 심혈이다. 심장의 피는 우리가 어떤 활동에 쏟아 붓는 사랑과 헌신이자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추진력이다. 그 누구도 피의 마법에 냉담할 수 없다. 심장외과 의사인 나 역시 피가 없으면 심장을 관찰할 수 없다. 인공심폐기를 사용하는 수술 때처럼 심장과 피의 연결을 끊을 수 없다. 심장은 피의 샘이고, 샘이 없으면 강도 없다.
피는 흘러야 한다
심장외과 의사는 엄밀히 말해 혈액외과 의사다. 물론 피를 수술할 수는 없다. 그들의 역할은 심장에서 분출된 피가 심방과 심실, 판막과 혈관을 통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이다. 피는 적절한 속도와 압력으로 흘러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심장병으로 피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면 심장외과 의사는 밸브 역할을 할 새 심장판막을 이식하여 역류를 막거나, 심장 중간 벽에 생긴 구멍을 막거나, 우회로를 내거나 인공 혈관을 삽입한다. 심장외과 의사는 심장보다 오히려 피와 더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살과 피
하미트의 목부터 가슴뼈 끝까지 피부를 절개하자, 하얀 결합조직과 노란 지방이 보였다. 여느 환자라면 피가 흘렀겠지만, 하미트는 출혈에 필요한 혈압이 없었다. 쇼크가 심하면 피부와 피하조직에 피가 공급되지 않고, 모세혈관이 너무 좁아져 혈구 하나조차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의 비상 전략이다. 혈액순환이 점점 줄어 결국 심장과 뇌에만 피가 공급되었다. 마취과 의사는 사후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혈팩을 하나씩 추가하며 상황을 보고했다. 나는 손에 쥔 메스가 가슴뼈에 닿을 때까지 깊이 넣어 단단한 근육을 단번에 절개했다. 그리고 전기톱으로 가슴뼈를 세로로 길게 완전히 갈랐다. 절단면에서 골수가 보였다. 골수 안에 있는 줄기세포는 분명 적혈구와 응고인자, 그리고 면역 방어를 위한 백혈구를 생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터다. 나는 갈라진 가슴뼈 틈새에 금속 리트렉터를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자 환자의 가슴이 연극 무대의 막처럼 활짝 열렸다.
수술실의 밝은 조명 아래 주인공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대 안쪽 깊숙한 곳에서 심낭 안에 든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여느 심장 수술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의 일부가 가슴샘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면역 체계의 특정 세포들, 이른바 T-림프구라는 특수 백혈구들이 외부 세포의 표면 특징(항원)을 인식하고 공격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들은 비록 칼의 공격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칼날에 있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는 맞설 수 있다. 심장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전기칼로 빠르게 가슴샘을 제거해야 했다. 심낭은 검은 피로 가득 차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준비됐죠?” 나는 주위를 보며 물었다. 모두가 끄덕였다. “응고인자를 해동해두었어요. 나중을 대비해.” 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응고인자가 심장에서 빠져나온다면, 응고인자를 쏟아 부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극복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젊은 환자는 과연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목숨을 살린 범행 도구: 우리 팀은 하미트의 심장에 도달했다. 하미트를 살릴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피였다. 아주 많은 피. 먼저 심낭을 열었다. 심장은 흉곽 안의 시퍼런 피 웅덩이에 빠진 펑크 난 타이어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피 웅덩이에는 피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다 어디로 갔을까? 밖으로 빠져나갔거나 몸 안의 다른 곳에 고여 있을까? 하미트의 심장이 다급하게 뛰었다. 수축할 때마다 찌그러졌고, 마취과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쏟아 붓는 아드레날린 채찍질에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했다. “피를 줘야 해요. 아드레날린은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외쳤고, 신성한 수술실에서 목소리가 유난히 거칠게 울렸다. “피, 피, 피가 필요하다고!” 생명, 생명, 생명이 필요하다고, 외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생명이 정확히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비닐팩에 담겨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마취팀이 차분히 대답했다. 당연히 맞는 말이었다. 나는 출혈 지점을 찾아 막아야 했다. 흉곽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넣어 심장 밑을 받쳐 내 쪽으로 살짝 돌렸다. 심장은 아직 힘을 잃지 않았으나, 근육 조직은 꺼져가는 불꽃의 색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칼은 좌심실 측벽에 꽂혀 있었고, 심장이 뛸 때마다 칼날에서 작은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상처는 물탱크에 생긴 좁은 균열과 같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내용물이 모두 빠져나올 것이다. 피는 심낭에 고이지 않고, 절개된 부위를 통해 왼쪽 폐로 사라졌다. 심장을 들어 올릴수록 피 분수는 더 세게 뿜어져 나왔다. 칼은 심장근육에 플러그처럼 꽂혀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것은 범행 도구이면서 동시에 구원자였다. 칼은 좌심실을 관통하지 않았고, 구멍을 내지도 않았다. 그랬더라면 하미트는 살아서 우리한테 오지 못했을 터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네요. 운이 좋았어요.” 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았다. 심장을 건드릴 때마다 심전도가 풀쩍 뛰어오르고, 혈압계의 빨간색 숫자가 주가 폭락 때처럼 빠르게 하락했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어요! 얼른 내려놓으세요.” 마취과 의사가 내게 경고했다. 심장을 내려놓자, 상황이 조금 안정되었다. 숨을 쉴 때마다 왼쪽 폐가 심장 앞쪽으로 밀렸다. 폐 역시 칼에 찔렸고 상처에서 피거품이 일어 시야를 가렸다. 조금 더 명료한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왼쪽 폐를 완전히 열어 얇은 흉막을 떼어냈다. 이곳 횡격막 위쪽 깊은 곳에 피 3리터가 고여 있었다. 이제 그것이 솟아올라 내 크록스 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까운 피를 이렇게 낭비해야 하다니!
심장외과 전공의 시절에 만났던 한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는 종종 우리 같은 심장외과 전공의들을 윙크와 함께 핏덩이 초보자라고 불렀고, 언제나 환자의 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강조하며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육체의 심장은 피에 있음이라, 레위기 17장 11절.” 또 우리의 과격한 손놀림으로 수술 부위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면, 이렇게 경고했다. 나는 그의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수술은 환자에 대한 큰 사랑과 피와 조직에 대한 존중으로 수행해야 하는 기술이다. “피를 통제하는 자만이 생명도 통제할 수 있느니라.” 그는 즐겨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현재 하미트의 출혈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 셀 세이버라는 흡입기로 최선을 다해 피를 빨아들였다. 이 기계는 흡입물을 배수구에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다. 생명의 붉은 다이아몬드(나는 적혈구를 이렇게 부른다)가 걸러져 모이고, 나중에 환자에게 다시 투여된다. 이제 폐가 흉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서 다시 약간의 공간이 더 생겼고, 심장이 더 선명하게 잘 보였다. 다음 단계를 계획해야 했다. 찔린 곳이 우심실이냐 좌심실이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오른쪽 심장에는 정맥혈이 채워져 있고, 이 피는 낮은 압력으로 폐로 흐른다. 우심실에서는 봉합 수술이 간단하다. 그러나 생명의 고속충전기인 좌심실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곳은 압력이 매우 높다. 그래서 봉합 수술이 근육을 찢을 위험이 있다.
인공심폐기를 쓰면 모든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치료를 위해 환자의 심장을 멎게 한 다음 여유롭게 수술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피는 이질적인 플라스틱 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는 플라스틱 관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여겨 응고를 시작한다. 전신 염증 반응이 생기고 귀중한 혈소판이 플라스틱 관 내부에 축적되어 쓸데없이 소모된다. 그러면 신체에서 사용할 혈소판이 남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방지하려면 헤파린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헤파린은 혈액 응고를 방지하지만, 그러면 출혈 성향이 높아진다. 그러나 하미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응고와 면역 체계일 것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졌다. 인공심폐기는 심장 수술을 더 쉽게 해주지만, 한편으로 출혈 상황을 악화시킨다. 나는 결정했다. “봉합할 준비해 주시고, 실도요.”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고, 체외순환사에게 “머리는 밑으로 수술대는 왼쪽으로 기울여요.”라고 말했다. 수술대가 지시대로 조절되었다. “인공심폐기 없이 해봅시다.”
칼날: “내가 뽑을 테니, 그 자리에 손을 올려 출혈을 막아요.” 나는 어시스트 아포스톨로스에게 말했다. “그 다음 봉합해봅시다. 그게 안 되면, 인공심폐기를 쓸 수밖에 없어요.” 나는 밖으로 나와 있는 칼자루를 잡고 천천히 당겼다. 아포스톨로스가 왼손을 밀어 넣어 심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후 상처를 압박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피가 덜 분출했다. “평범한 생선칼이지만, 칼끝이 가시처럼 아주 뾰족해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아포스톨로스가 말했다. 그가 손가락을 옆으로 치우자, 작은 피 분수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내 얼굴로 분출했다. 루페 안경을 닦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나는 봐야 할 것을 보았다. 좌심실 측벽 근육층이 약 4센티미터나 갈라져 있었다. 근육 동맥이 분출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관상동맥 말단의 작은 혈관이었을 것이다. 이 동맥을 통해 심장이 피와 산소를 공급받는다. 실이 꿰져 있는 반원형 바늘을 홀더째 받아 들고, 빠르게 뛰는 박동 사이의 짧은 정지 순간을 기다렸다가 재빨리 첫 땀을 꽂았다. 손목을 빠르게 움직여 상처 난 근육 한쪽에 바늘을 꽂고, 다른 쪽 근육에서 바늘이 다시 보일 때까지 반호를 그리며 상처 아래로 통과시켰다. 하미트의 심장과 속도를 맞춰야 했다. 다음 심장 수축이 시작되기 전에 한 땀을 완료해야 했다. 심장은 짧은 순간씩 여러 번 박동을 멈췄는데, 마치 잠깐 갈피를 잃고 멈췄다가 다시 뛰는 것처럼 보였다.
한 땀씩 매듭을 짓지 않고 여러 땀을 이어나갔다. 근육에 작용하는 힘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 마지막 땀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매듭을 지을 계획이었다. 한 땀 한 땀 이어나갈 때마다 아포스톨로스의 손가락이 몇 밀리미터씩 물러난 덕에 피가 많이 새지 않아 봉합할 부위를 계속 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땀을 꽂으려 할 때 심장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미트의 생명이 멈췄다. “젠장, 빌어먹을!” 마취과 의사가 욕을 뱉었다. “혈압이 없어요.” 심장에 직접 심폐소생술을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방금 봉합한 부위가 뜯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공심폐기에 연결하는 것인데, 연결하는 데 3분 정도 걸릴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재난을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외쳤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봉합을 계속하겠습니다.” 세동 상태의 심장은 수축과 팽창을 하지 않고 미세하게 진동만 하므로, 꿰매기가 더 쉽고 당연히 매듭을 짓기도 더 쉽다. 하미트는 이 상황을 1~2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땀을 완성하고 미세하게 진동하는 심장에서 다섯 땀 모두를 완료하는 최종 매듭을 지었다.
“제세동기 준비, 20줄 차지!” 아포스톨로스는 날달걀 같은 심장을 다시 심낭에 넣었고, 나는 심장 주위에 충격 패드 두 개를 댔다. “샷!” 심장이 격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멈췄다. 미세한 진동조차 사라졌다. 수술실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 숨을 죽였다. 여전히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의 적, 저승사자만이 이제 자기가 나설 차례라고 내게 알리려는 듯이 은밀히 눈을 치켜떴다. 그때 모니터의 작은 빨간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하지만 마치 악몽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힘없이 느릿느릿 뛰었다. 다시 기적이다! 생명의 기적.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천천히 피가 채워졌고, 다시 순환하고, 혈압이 오르고… 오르고… 올랐다.
골든타임
하미트의 피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폐는 산소로 채워졌으며, 적혈구는 가장 밝은 진홍색으로 빛났다. 그런데 불행히도 모든 곳에서, 혈액 응고에 문제가 생겼다. 환자는 파종성혈관내응고증을 앓고 있었다. 쉽게 말해, 응고에 필요한 모든 단백질과 효소가 엉뚱한 곳에 소진되어 수술 과정에서 생긴 여러 작은 상처에서 지혈 작용이 일어날 수 없었다. 절개 부위, 가슴뼈를 덮고 있는 피부와 근육, 지방조직, 가슴샘 등등 곳곳에서 출혈이 있었다. 모든 작은 혈관이 터졌고, 하나를 막으면 그 옆에서 또 피가 나기 시작했다. 피와 함께 체온도 빠져나갔다. 그런데 우리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피를 잃으면 너무 추워지는데 이런 증상을 저체온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피의 응고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피를 많이 흘릴수록, 몸은 더 차가워지고, 피의 응고 능력은 더 떨어진다. 그것이 악순환의 첫 단계다. 다음 단계가 곧바로 뒤따른다. 피를 잃으면 세포에 산소를 운반하는 능력도 잃는다. 그러면 세포들은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렇다, 폐만 숨을 쉬는 게 아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100조 개에 달하는 세포 하나하나도 숨을 쉰다. 이 과정을 내호흡 또는 세포호흡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생명의 진원지다. 각 세포는 자체 물질대사와 에너지 생산 능력을 갖춘, 자율적인 작은 유기체다.
우리 몸은 산소 없이, 공기 없이, 무산소 유형으로도 소량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점이 하나 있다. 비상 모드에서는 에너지의 극히 일부만 생산되고, 피가 산성화되며, pH 농도가 떨어진다. 이것을 산증(酸症)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운동을 하면서 이것을 경험했을 터다. 숨이 찰 정도로 과격하게 운동을 하면 근육이 산소 없이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젖산이 생성되기 때문에 근육통이 생긴다. 이는 영향을 받은 부위에서만 생기는 국지적 과정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피가 체내가 아니라 체외로 흘러 몸 전체와 모든 기관의 모든 세포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에너지 생산이 전체적으로 무너진다. 그 결과, 산증과 저체온증이 발생하며 피의 응고 능력도 감소한다. 그래서 저체온증, 산증, 응고장애는 죽음의 3요소 또는 죽음의 소용돌이라고도 불린다.
의사가 이런 죽음의 소용돌이에 개입하여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간이 있다. 이 기간은 오랫동안 ‘골든타임(golden time)’이라고 불려 왔다. 그러나 복잡한 생물학적 시스템이 항상 인간의 상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환자의 생명 시계는 조금 더 빨리 가고, 또 어떤 환자의 생명 시계는 조금 더 느리게 가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기간의 의미를 살려)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 골든아워의 길이가 정확히 얼마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야 알 수 있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환자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다. 하미트의 생존 여부는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수술대에서 외과적으로 출혈을 막은 이후, 마취와 집중 치료 기간이 시작되었다. 마취과 의사는 환자를 잠시 재우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호흡기, 신경계, 신장, 호르몬, 심혈관순환계, 그리고 가장 큰 기관인 혈액 등, 신체의 주요 시스템도 관리한다. 또한 신체 외상일 경우 혈액을 적혈구 농축액으로 대체하고, 혈소판과 응고인자를 통한 혈액 응고 조절도 마취과 의사의 역할이다. 루트비히 렌 시대 이후로 심장 수술은 기술 발전과 인공심폐기뿐 아니라 혈액제제 덕분에 더욱 안전해졌다.
혈액제제는 환자의 목숨을 살린다. 그것 덕분에 우리는 환자를 “수술대에 그대로 두지 않고, 수술대에서 내보낼 수 있다.” 수술대에서 내보내거나 그대로 둔다는 말은 외과 의사들끼리 수술실에서 환자의 생존 여부를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하미트는 아직 고비를 완전히 넘기진 못했다. 그저 수술대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수술실에서는 막이 내렸다. 동료 의사들이 환자의 가슴을 닫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공연이 끝난 것이 아니다. 그저 제1막이 끝났을 뿐이다. 저승사자는 기둥에 기대어 끈기 있게 제2막을 기다렸다. 하미트의 생명을 다루는 이 공연은 총 몇 막으로 구성되었을까?
생명
생존
3개월이 지났다. 가을이 겨울로 바뀌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따뜻한 날이었고, 붓꽃이 피고, 하늘은 파랬다. 여느 오후처럼, 나는 수술을 마치고 환자의 상태를 살피러 중환자실에 갔다. “세상에! 저기… 케이크를 들고 오네요.” 한 간호사가 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쁜 소식이 아니라 케이크니 다행이죠!” 지나가던 다른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금세 소문이 돌았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 모두가 작은 라운지로 모여들었다.
누군가 내 팔을 잡고 라운지 쪽으로 데려갔다. “바클라바예요.” 소리가 먼저 들렸고 그다음 검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짧게 잘려져 있다. 처음 하미트를 봤을 때, 그는 응급실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이 또렷이 떠올랐다. 지금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여전히 심각한 질병으로 힘들어하지만, 살아 있다! 열린 셔츠 칼라 사이로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흉터가 보였다. 오랫동안 호흡을 담당했던 기관절개 흉터였다.
하미트는 수척해졌고, 움직임이 로봇처럼 어색했고, 지팡이를 짚고 불안하게 몸을 떨며 느릿느릿 걸었다. 중환자실에서 몇 달을 누워 지낸 환자들은 엄청난 근육 손실과 신경계 장애를 겪는 다발성신경병증을 앓는다. 하미트는 아직 나를 보지 못했고, 떨리는 손으로 바클라바를 각양각색의 접시에 나눠 담느라 바빴다. 간호사들이 순서대로 그를 안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간호사들 모두가 하미트의 운명에 감동했다. 몇 주 동안 아기처럼 보살폈던 하미트가 퇴원하던 날은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었음에도, 하미트가 이겨낼 것이라고 모두가 믿었었다.
일반적으로 중환자실 환자 상당수는 사망하고, 일부는 계속 중환자로 누워 지내야 하고, 극히 소수만이 다시 두 다리로 일어선다. 20년 넘게 심장 수술을 하면서 나는 환자가 직접 다시 찾아오는 일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아마 중환자실은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장소일 것이다. 환자의 약 절반이 중환자실에서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한다. 그들은 하루 24시간 모니터와 의료기기의 소음 공해에 노출되고, 낮과 밤의 리듬이 깨지고, 때때로 투여되는 마취제가 기억을 지우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환자에게 고용량의 진통제를 투여하더라도, 바늘과 호스를 몸에 삽입하기, 심지어 씻기 또는 침대에 눕거나 일어나기 같은 기본적인 일조차 고통스러울 수 있다.
참고로 많은 환자가 스스로 호흡할 힘이 없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호흡한다. 그런데 인공호흡기는 기도에 이물질이 있는 불편한 기분을 동반하고, 또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의사소통이 제한적이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은 자율성이나 프라이버시가 없고, 혼자 화장실에 갈 수도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식사도 할 수 없고, 튜브를 통해 영양분이 공급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후에는 걷기, 먹기, 읽기, 집중하는 법 등을 배우는 재활 단계를 한 달 정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는 환자 혼자서는 해낼 수 없고, 친구와 가족이 사랑으로 보살필 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생존을 두려움 속에 기다리면서, 친구와 가족은 정신적 인내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가족의 30~80퍼센트 역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아무튼 하미트가 나를 알아차렸다. “박사님!” 그는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웃고 울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내 심장을 손에 쥐었던 분이십니다.” 친절한 간호사가 하미트를 테이블까지 부축했다. 간호사는 내게 바클라바를 잘라주려 했지만, 하미트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모두에게 한 조각씩 나눠주고자 했다. 그동안 받기만 했다며 마침내 뭔가를 주고 싶다고 했다. 참고로 하미트는 감사 표현이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에서 태어났다.
탈출: 이날 오후 내 사무실로 함께 와서 하미트는 그때 겪은 일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퇴원할 때 심장에 칼이 꽂힌 엑스레이 사진을 갖고 싶어 했지만, 그런 사진은 없었다. 왜냐하면 엑스레이를 찍을 겨를 없이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사진도 없다. 모두 아프가니스탄에 두고 왔다. 아버지가 죽은 후 하미트는 형과 교사인 어머니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했다. 피난 중에 그들은 끔찍한 일들을 겪었는데, 그들은 자주 구타를 당했고,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어머니는 강간을 당했다. 또 그들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발은 상처투성이였고 옷은 누더기였다.
하미트는 피난길에 좋은 일도 겪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박사님! 난민들은 전례 없는 연대감으로 서로를 지지했고, 모두가 서로 도왔습니다. 거기서 나는 많은 힘을 얻었어요.” 이 단출한 가족은 독일에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1년 동안 큰 불확실성 속에서 난민 보호소 생활을 했다. 난민으로 받아들여질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난민 지위가 인정되었고, 하미트 형제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 형은 캐나다로 이주했고 하미트는 독일에 머물며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때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고, 눈물을 보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박사님! 라라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증오했을까요? 나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보자마자 욕부터 했고 내 얘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어요. 얘기를 나누려고 거기까지 갔는데 말이죠. 라라의 아버지와 평화롭게 잘 지내고 싶었고, 라라를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항상 라라를 지켜줄 거라고 말하려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칼을 들이댔어요. 노인이니 그냥 밀어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국경에서 어머니 목에 칼을 대고 놈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어머니를 강간했던 그때처럼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마비된 사람처럼요.”
하미트는 평정심을 완전히 잃었다. 나는 같이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어렸을 때 영혼을 다친 거예요. 칼을 들이대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그 상처가 다시 깨어난 거죠. 방아쇠가 당겨졌다고도 하죠. 그 순간 당신은 내적으로 얼어붙은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동결 반응이라고 부릅니다. 당시에는 이 반응이 당신과 어머니의 목숨을 구했어요. 이번에는 그런 반응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고요.” “항상 칼이 문제예요.” “칼은 어디에나 다 있어요. 어떨 땐 아무렇지도 않고, 또 어떨 땐 아주 끔찍해요.”
하미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래된 상처와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트라우마 재현을 경험했다. 나는 그에게 상처 치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신체 외상으로 피를 흘리면 환자는 치료를 받고 당연히 공감과 돌봄도 받는다. 반면에 영혼의 상처는 거의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의 쇼크 상태를 어떻게 치료했는지 상세히 얘기해주었고, 영혼의 상처에서도 전문적이고 공감적인 치료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골든아워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칼에 찔려 자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포에 독이 퍼지는 패혈증을 앓았어요. 치유를 받지 못한 영혼의 상처는 패혈증과 같습니다. 당신의 삶에 독이 퍼지죠.” 그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고, 뭔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몸짓으로 얼굴에 남은 눈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닦아냈다. “그때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탈출했어요. 그것을 해냈죠. 하지만 내 마음이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부터 달라질 겁니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거니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시지 않아 슬프네요.” “어머니에게도 필요했을 텐데 말이죠. 이제 내가 치료를 시작하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어머니도 함께 데려갈 겁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르죠. 진심으로 응원하고 앞으로도 계속 잘 걸어 나가기를 바라겠습니다!” “꼭 그렇게 할 겁니다.” 그가 약간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라라 때문에라도. 결혼하면 더는 절뚝거리고 싶지 않아요!”
피와 사랑
9개월 후 하미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하미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빨간색 신호등에 차를 멈췄는데, 하미트와 라라가 손을 잡고 내 앞으로 길을 건넜다. 라라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누가 봐도 임신부다. 칼에 찔려 실려 왔던 나의 환자가 곧 아빠가 된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하미트는 건강해 보였고 발걸음도 가볍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계속 살아갈 의지도 갖고 있었다. 라라 안에서 자라는 새 생명도 인생 최대 역경을 극복해낸 아빠의 능력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자신을 지원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믿을 수 있는 보호자가 최소한 한 명 이상 필요하다. 피부색, 성별, 성적 취향, 종교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자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출혈은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다산의 상징이어야 한다.
섹스: 생명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합쳐져야 한다. 이것 역시 피와 관련이 있다. 월경을 하지 않는 여성은 생식능력이 없고, 남성 성기에 피가 채워지지 않으면 자식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파트너를 유혹하는 데 피를 이용한다. 피는 입술을 붉게 물들여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 큐피드의 화살이 심장에 꽂히면 혈압과 맥박이 증가한다. 그 결과 영혼만 활짝 피는 게 아니다. 혈관이 확장되면서 피부도 다양한 혈색으로 만개한다. 이 현상을 섹스 플러시 또는 성적 홍조라고 부른다. 얼굴, 목, 가슴, 배 등에 나타나는 흥분의 색상은 연분홍에서 버건디까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랑이 열정으로 바뀌면, 몸의 액체가 흐르기 시작하고 쾌락 기관의 혈류가 증가한다.
쾌락 기관의 혈류가 증가하면서 머리의 혈류가 약해지는 일이 때때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헛소리를 하거나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말 뇌에 피가 부족해지는 것은 아니다. 섹스도 머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몸 전체 혈류량의 30퍼센트가 대체로 일정하게 뇌에 공급된다. 뇌에 피를 공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대뇌자동조절이라는 별도의 생리학적 제어회로가 이를 담당한다. 혈류는 뇌 스캔에서 특정 부위를 빛나게 한다. 해부학자들이 측위핵이라고 부르는 부위가 있는데, 격식을 버리고 편하게 말하면 섹스 담당부서라 할 수 있다. 이 핵은 성욕을 증가시키고,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이용해 행복감을 중독 수준까지 높인다. 그러면 우리는 살이 서로 닿는 것을 넘어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닿아 몸이 하나로 결합되기를 갈망한다.
한편 첫 경험으로 처녀막(질 입구 주름)이 찢길 때 피가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작은 신체 외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주로 핏방울로 상징되고, 일부 문화권에서는 처녀와의 섹스를 명예와 소유로 여겨 여성을 사물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삽입이 가능하도록 남성 성기의 동맥이 확장하고 발기 전보다 최대 40배나 더 많은 피가 해면체에 채워져 음경이 서너 배 더 커진다. 그 결과, 평소 곧장 다시 심장으로 피를 돌려보내는 정맥이 눌린다. 다시 말해, 많은 피가 들어오고 적은 피가 흘러나가, 음경은 바람을 채운 에어 매트리스처럼 펼쳐지고 세워진다. 발기된 음경의 해면체 혈압은 최대 400수은주밀리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순환계의 정상 혈압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이런 엄청난 혈압 역시 펌프 기능을 하는 심장이 아니라, 혈액순환을 조절하는 다양한 호르몬과 신경조절회로를 통해 만들어진다. 늘 그렇듯 최전선에는 혈액순환의 선봉이자 산화질소로 동맥을 넓히는 적혈구가 있다.
한편 여성에게도 어엿한 발기조직 해면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처럼 겉으로 튀어나와 있지 않고 골반 안쪽으로 약 10센티미터쯤 뻗어 있고 최대 300퍼센트까지 부풀 수 있다. 바깥쪽 끝에 음핵이 있는데, 이 역시 흥분하면 똑바로 선다. 그러나 그것은 몸속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화산의 끝부분만 겨우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부부가 하나로 합쳐지면, 피뿐 아니라 침도 흐른다. 키스를 통해 입술과 입술이 서로에게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이것은 면역 체계를 강화한다. 자연은 예방접종 문제를 매우 기발하게 해결했다. 사랑하면 서로 핥는다! 이런 행위는 피를 돌게 하고, 그 안에서는 사랑호르몬 옥시토신과 성호르몬이 헤엄친다. 피가 없는 섹스는 무미건조할 것이고, 우리는 결합할 수도 없고 사랑을 나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새 생명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작가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책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생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주 실용적으로 설명했다. “생명이 무엇이든, 화학 측면에서 보면 놀랍도록 평범하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슘 약간, 황 약간, 기타 몇몇 일반적인 원소들 약간. 일반 약국에서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필요한 화학 재료는 이게 전부다.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특별한 한 가지는 생산자가 당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기적이다.”
애벌레가 언젠가 나비로 변신할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생긴 생명체인 애벌레와 나비의 DNA가 완전히 똑같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비로 변할지 또는 얼마나 빨리 변할지, 얼마나 클지, 날개가 어떤 색일지, 얼마나 잘 날 수 있을지 등은 DNA뿐만 아니라 온도, 날씨, 먹이, 그리고 어미가 알을 성장에 유리한 장소에 낳았는지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이 모든 외부 요인의 영향으로 나비의 어떤 유전자가 읽히고 어떤 유전자가 읽히지 않는지, 또는 나비의 날갯짓이 언젠가 허리케인을 유발할 수 있을지 그저 우리의 마음에 기쁨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낼지 결정된다. 후성유전학은 환경이 생명체의 게놈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만 집중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더 큰 전체인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지구 및 환경과의 연관성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보고 만지고 땅 위에 서 있을 뿐 아니라 호흡으로 세상을 들이쉬기도 한다. 우리 인간과 이 세상을 처음부터 연결해주는 것은 호흡이다.
세상의 호흡: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탯줄이 끊어진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숨쉬기다. 엄마의 자궁에서 나와 지구의 대기권에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첫 번째 호흡으로 우리는 엄마의 피와 폐에서 받은 숨을 뱉어내고 지구의 공기를 직접 들이쉰다. 기도가 열리고 우리는 지구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렇게 연결된 우리와 지구의 관계는 마지막 숨이 멎을 때까지 지속된다. 피의 중대한 임무는 숨 쉴 공기를 운반하고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순환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산소를 들이쉬고 이산화탄소를 내쉰다. 식물은 정확히 그 반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전체 생명체와 호흡을 교환한다. 지구는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우리는 지구를 숨 쉬게 한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순환에 통합되어 다른 생명체와 상호작용 하는 열린 생명체다. 호흡만 그런 게 아니다. 소변, 대변, 침, 눈물을 우리 몸 밖의 더 큰 생태계로 돌려보내는 일, 이른바 재활용 역시 자연과 하수처리장의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담당한다.
호흡은 외부와 내부, 지구의 공기와 우리의 피를 연결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하므로 폐순환이라는 별도의 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 회로는 산소가 부족한 정맥혈을 오른쪽 심장에서 폐로 운반한다. 폐에서 산소를 넉넉히 실은 피는 왼쪽 심장으로 흐른 다음 전신순환으로 이동하여 몸에 산소를 공급한다. 엄마 뱃속에서는 폐순환이 무의미하다. 양수에서 헤엄치고 아가미가 없어 스스로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태아는 공기 호흡을 하지 않으므로 피가 폐에서 산소를 받을 필요가 없어 동맥관이라는 지름길을 통해 폐를 우회한다. 첫 번째 호흡과 함께 폐가 펼쳐지고 폐순환이 열리고 동맥관이 닫힌다. 인간의 순환은 우심실에 근육이 적어 압력이 낮은 폐순환과 좌심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압력의 전신순환, 이렇게 2가지 순환으로 분리되어 있다. 수생생물에서 육지생물로의 전환이 완료되었다.
이제부터 피뿐 아니라 숨도 흐른다. 들이쉴 때마다 숨은 입과 코를 지나 기도로 빨려 들어가고 거기서부터 점점 작아지는 기관지를 따라 흘러 작은 공기주머니인 허파꽈리(폐포)에 도달하여 정지한다. 나무를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도가 줄기이고 기관지가 잔가지, 허파꽈리가 작은 나뭇잎이다. 허파꽈리에서는 깊이 흡입된 공기와 혈류 사이에 아주 미세한 막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산소 분자가 안으로 들어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과 결합하고, 동시에 밖으로 방출될 날숨에 이산화탄소 분자가 탑승한다. 호흡은 우리 내부와 바깥세상의 가장 내밀한 연결이다. 허파꽈리는 얇고 투과성이 매우 좋다. 피는 이곳에서 산소를 싣고 더 멀리 떨어진 기관으로 이동한다.
지구상의 유기체 대부분은 단세포생물로 구성되어 있다. 단세포생물은 피도 폐도 필요치 않고, 세포막을 통해 환경과 직접 교환한다. 우리 인간도 이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여전히 피부 모공을 통해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피부를 통해 보급되는 산소는 전체 필요량의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고등 생물은 산소를 흡수하고 분배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폐, 피, 심장이 바로 그런 기관이다.
우리의 기도와 폐는 흉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있다. 그들의 표면적은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 표면보다 40배 더 크다. 공기를 운반하고 교환할 수 있는 표면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기관지와 혈관은 계속해서 가지를 뻗어나가며 비슷한 형태로 꼬이며 성장한다(즉, 전체 모양과 개별 구성 요소의 모양이 유사하다). 콜리플라워의 작은 꽃 하나가 전체 콜리플라워와 똑같이 생긴 것과 같다. 자기 유사성의 이 매혹적인 기하학은 화면 보호기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점점 자라는 망델브로 기하학 패턴이나 프랙털 도형으로 묘사할 수 있다. 작은 특이점 하나를 말하자면, 우리 눈의 각막에는 혈관이 없다. 항상 선명한 시야를 확보하고 모세혈관으로 인해 시야가 탁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막은 피에서 산소를 공급받지 않고 공기에서 직접 산소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