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
세상을 보는 여러 가지 관점
세계관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다. 쉬운 예를 들면, 노란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사람의 눈은 노란 안경을 끼는 것처럼 어떤 관점, 태도, 가치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본다. 세계관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다 세상을 똑같이 볼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먹어야 하고, 가정을 이루어 사는 등 모두 비슷하니까 그와 같이 세상도 비슷하게 볼 것으로 생각했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 말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이성이란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은 같은 이성이 있기에 궁극적으로 모두가 세상을 같이 보게 되어 있다고 믿었다. 다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좀 뒤떨어져 있어서 자기들만큼 그렇게 정확하게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자기들과 비슷하게 보고, 생각하고 평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에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되어서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런 생각이 잘못이란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 태생 미국 문화인류학자 보아스는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Inui)족의 문화를 연구하고, 이누이 문화는 서양 문화에 ‘뒤떨어진’ 문화가 아니라 ‘다른’ 문화란 주장을 펴서, 오늘의 문화 상대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이지 ‘틀리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다 옳다’는 관점이다. ‘제 나름대로 다 옳은 이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그와 반대로 ‘아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입장이다. 이 두 가지 태도 중 첫 번째 경우, 즉 모든 것이 다 자기 나름대로 옳은 것이라는 입장을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상대주의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전 세계에 지배적인 경향은 대체로 상대주의적이고, ‘문화 상대주의’는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세계관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국가와 법, 도덕성 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도 반영된다. 즉 구체적 사건에 관한 판단이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계관 대신 ‘가치관’이라고 표현하고, ‘확신’이니 ‘신조’니 하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신조가 다르다’ 혹은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등이 공적 영역을 차지하고 종교는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서 공적 영역에는 간섭할 수 없으며, 그래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런 문화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치, 경제, 학문, 기술 등과 종교적 신앙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져보면, 모든 사람은 종교가 있고, 정치, 경제, 학문 등도 사실은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부지불식간에 종교적 신앙에 따라 결정된다. 이 책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쓰였다.
문화의 결정적 요소, 종교
한 문화의 특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다. 지금도 세계 문화를 유교권, 불교권, 이슬람권 등으로 나누는 것을 보면, 문화에 끼치는 종교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고, 그 자취가 지금도 상당히 크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리 혹은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인간, 삶에 대한 고유한 관점이 있고,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종교의 특성이라면, 그 영향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사고와 평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는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야 한다.
또한 세계관은 개인적이기보다는 공동체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이다.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가치 판단에서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기보다는 한국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정치적 판단이 전형적인 예일 것 같다. 한국 국회의원 중 약 삼분의 일이 기독교인이고, 천주교인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에 가깝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에 기독교적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정치는 기독교적이지 못한가? 그 의원들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정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새벽기도회에도 출석하지만, 정치는 비기독교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살고 행동하지 못한다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관에 대해서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세계관 바로잡기
우리가 세계관에 관해 논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자문해 본 결과 그것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 같은 것에 관심도 없고,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모르면, 세계관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 신자와는 달리 세계관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연 종교는 세계관에 관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각자 생각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종교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라고 했다(이사야 55:8~9). 계시를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 소위 자연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느낀 것이 일반화되어 만들어진 문화에 그냥 젖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을 보아야 한다.”라고 계시하셨다. 계시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올바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실 이유가 없었다. 또 기독교의 계시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의식할 수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비판할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유리한 조건에 있다. 즉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명시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적 바탕 위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기에,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훨씬 더 비판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어떤 것이고 이 세상이 어떠한가를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이 된 사람에게나 가능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경이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있고,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거나 어릴 때 성경 교육을 받는 등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반성적일 수 있고, 잘잘못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계관의 핵심적 요소: 하나님의 존재
무신론과 유신론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존재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바울이 표현한 대로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것이 일관성 있는 결론이다(고전 15:32). 하나님의 존재는 사람의 가치관, 삶과 죽음에 관한 태도, 삶의 목적 등 사람의 모든 중요한 것에 영향을 끼친다. 신의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들이, 그렇지 않은 사회들과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보면, 그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무신론과 구별되는 불가지론도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이론적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을 잃은 현대 지성인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입장이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무신론자보다 불가지론자들이 더 많다.
종교의 씨앗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심각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이다. 우리 인간은 다 죽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주로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여론 조사에서 “죽음에서 가장 두려운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음 후에 자신이 처할 상황에 대한 불안이 더 크다고 대답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불가사의하고 불가항력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히 높다. 일본은 세계에서 과학 기술이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국민의 지식수준도 상당히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미신이 가장 많은 나라다. 일본은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초월적 힘을 의지하려 한다. 인격적 신이든, 잡신이든, 운명이든 신적인 것 혹은 초자연적 힘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이러한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으로 ‘누멘’(numen)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神)의 행위, 영향력, 신비스러운 힘을 뜻하는 말로 고대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신적인 것, 인간과는 다른 큰 힘과 영향력과 지혜가 있다는 의미다. 어떤 사건이 우리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일 때, 우리는 겁에 질리고 공포감을 느끼며 그 대단한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오토는 이런 ‘성스럽고도 위압적인 두려움의 정서’가 종교의 기원이라 했다. 또한 칼뱅은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느낌’이 있고, 그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느끼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이 신에 대한 느낌이고 종교의 씨앗이다.
인격적인 하나님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인격이란 ‘자유의지가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이나 법칙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즉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할 수 있어야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사리가 분명한 결정을 하면, ‘올바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했다면, ‘자의적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의지는 자의적(恣意的, arbitrary)이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결정한다면, 하나님이 따라야 하는 법칙이나 권위가 또 하나 있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란 말은,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보다 더 높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위대한 교부요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자의적임을 강조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자의적 결정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 신관의 가장 극단적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윤리학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입장 차이다. 둘 다 소위 신명론(神命論)을 따른다. 즉 우리가 왜 어떤 행동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기준이 하나님의 명령이란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나쁜 것을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즉 천주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개신교는 하나님 명령 자체가 그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 외에 어떤 다른 기준도 순종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이다. 자유롭게 결정하시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신실함에 관해 신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불변함과 신실함은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차이가 엄연하다. 신실함은 인격적 요소를 품고 있지만, 불변은 물리적 특성을 나타낸다. 디모데후서는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하나님은 약속을 뒤집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고 해놓고 그 뜻을 바꾸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며, 그 사랑은 일방적 사랑, 즉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신실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의지할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욥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욥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큰 고난을 당한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찌 내 생각을 아느냐.”라고 꾸짖으신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욥의 항의가 정당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무지한 소리 그만하라고 꾸짖으신다.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나름대로 이론을 세워서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 방식일 뿐이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
사람들은 스스로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른 성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세상의 이런 지혜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를 전하는 성경과 그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매우 어리석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사람이 된 하나님이 십자가란 치욕의 형틀에서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어 보인다.
고린도전서 1장 26~27절을 보면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25절에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자신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지혜를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도 믿고 신적인 존재의 능력에도 의지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을 택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지적한다(롬 1:22-23).
그러므로 우상은 하나의 타협이다.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종교의 씨앗과 인간의 지혜가 타협해서 생겨나는 것이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은 사람의 지혜로 설명이 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모순같이 보이는 분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없다. 그런 대상은 사람들의 지혜에 어긋나기 때문에 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지혜에도 어울리고 불안도 해소해 주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겸해서 갖추어야 우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생각보다 높은 하나님 생각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네덜란드의 철학자이며 나의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였던 C. A. 반 퍼슨 교수는 그의 『또 그분』이란 책에서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분으로 특징지었다. 놀라게 한다는 말은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것, 인간의 논리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계시 내용이 우리가 생각할 때 상당히 논리적이고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놀랄 이유가 없다. 그런 정도의 내용이라면 사람이 써놓고서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길,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창 12:2),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다(창 13:15~16).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도 자녀가 없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충실한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인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을 다시 확인하셨다(창 15:4).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이 백 살이 다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아들도 없이 어떻게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겠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 뜻을 이루겠다고 생각하고 하갈이라는 첩을 맞았다. 자기 아내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으니 하나님이 첩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식을 주시는가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이 아니라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다. 창세기 18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가 대언하는 것을 듣고 사라가 웃는다.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 이름도 ‘이삭(웃음)’이라고 짓지 않았는가?
기상천외의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웃는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을 때 ‘웃긴다’라고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를 ‘웃기는’ 분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궁리했는데 바로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지혜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기대하지 못했던, 심지어 사라를 웃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창 21:2).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보았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사라가 혼자서 말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창 21:6). 이제 사라는 좋아서 웃었다. 이삭은 웃음의 아이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사람의 논리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책임
질서, 예측, 그리고 안정감
인간은 질서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이 예측대로 일어나야 안전하다고 느낀다. 기대했던 것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질서이다.
17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캄파넬라나 20세기 작가 A. C. 클라크는 고대사회의 주술과 오늘날의 공학은 비슷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의 기술이 옛날의 주술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현상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 과학 기술이라면 고대에는 주술로 그런 것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질서, 가령 아침이 되면 해가 뜬다든가 춘하추동 현상은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어떤 질서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예를 들어 물이 어는 현상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거기에 무슨 귀신이 있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지식이 늘어나고 경험이 쌓이니까 그 속에 무슨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질서한 것같이 보이는 데서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사실상 과학이다. 과학자들은 현상에서 어떤 법칙을 발견하려고 관찰하고 연구한다. 법칙을 알면 그 법칙에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다스리려면 그 법칙을 알아야 한다.
법칙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일
옛날에는 임금이 나라를 자의적으로 다스렸다. 올해는 세금 30% 내라고 하면 백성들은 내야 한다. 그다음 해에는 20%만 내라고 하면 또 그렇게 낸다. 이렇게 자의적이라면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계획도 세울 수 없다. 그러다가 그것을 보완하는 입헌군주제가 생겼다. 헌법을 만들어서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다스릴 수 없도록 했다. 법을 만들어서 그 법에 따라 지배하도록 하면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계획도 세울 수 있다. 즉 어느 정도 안정과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
옛날에 왕이 다스릴 때 소위 왕권신수설이란 것이 있었다. 왕은 하나님이 다 점지한 것이지 사람 마음대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하나님이 점지하셨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왕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아니다. 왕은 우리가 약속해서 뽑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왕이 없으면 사회가 무질서해지니까,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왕을 두고, 또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 질서의 권위가 많이 달라졌다. 인위적 질서에 너무 쉽게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교황 선출은 특이하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Conclave)라는 비밀회의 장소에 들어가서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고, 교황이 뽑힐 때까지 투표를 거듭한다. 그런데 교황이 비록 추기경들의 투표 형식을 빌려 선발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교황이 된 사람이 임명하는 신부도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된 신부의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하게 되어 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가 타락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성직에 대한 이런 생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교황과 사제들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그들의 부패를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는 우리에게 권위가 있는 것은 성경이 유일하다고 믿는다. 성경 외에는 교황이고 목사고 아무도 절대적 권위가 없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인위적 질서가 가지고 있던 신비롭고 신성한 성격이 점점 세속화되어 ‘이것도 사람들이 약속해서 만든 것이다’란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질서를 매우 두려워한다. 그래서 질서에 신성한 의미가 있다고 믿으면, 사람들이 그 질서를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면 사람들이 항거하지 못하고 순종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데도 그것을 신격화한 후에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면, 사람들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실망한다. 어제까지는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보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신앙도 심한 손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하나님이 만든 질서라고 규정하고, 긍정적 면만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질서, 인위적 질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만들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모든 인위적 질서는 공정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모든 질서가 다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기술 발달과 인간의 책임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그만큼 인간의 책임이 커져 버렸는데, 그 책임을 다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 더 큰 재앙이 오는 것을, 그런 사건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1977년 11월 이리역(지금은 익산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화약을 잔뜩 실은 기차가 이리역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사과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그 초가 다 타서 상자에 불이 붙었고, 그것이 화약에 옮겨붙어 결국 이리시 전체가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사과상자에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든 그 사람은, 자기가 책임져야 할 힘이 어느 정도인지, 즉 자기가 잘못해서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 인식이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형 사고들이 대개 그렇게 해서 일어난다. 이런 것을 안전 불감증이라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힘은 엄청나게 커졌는데, 책임 의식은 그에 상응할 만큼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는 “자연법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고, 사회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인간 사회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져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연 질서 법칙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심리적 안전감을 자연법칙에 두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두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자연법칙을 확실하다고 생각해 왔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안전을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법칙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참새가 날아다니다가 무슨 병이 들었거나 기운이 약해져 떨어졌다면, 틀림없이 그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연법칙 그 자체를 객관적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법칙과 하나하나의 사건 안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작용한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이다.
안전 보장과 하나님의 사랑
자연법칙은 어떤 형식으로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법칙들이 그대로 하나님이 내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연법칙에 우리의 안전 보장을 위탁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는 없다. 많은 신학자들이 자연과학을 상당히 신봉하고, 과학자들이 발견한 법칙이 하나님이 주신 법칙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최근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들이 모두 그렇게 객관적이고 확실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의사가 수술해주거나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하나님께 별로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도 먹지 않고 수술도 안 했는데 기도해서 병이 나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기적을 통해서 고쳤든 의술을 이용해서 고쳤든, 병이 나은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대개 의술도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본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약과 수술로만 고쳤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자연 질서 그 자체에 우리의 안전보장을 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질서 혹은 자연법칙은 확실하니까 그것에 의해 설명하거나 그것에 의해 예측하면 틀림없다는 것에 우리의 믿음을 두지 말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순간순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믿음을 두자는 것이다. 초자연적 현상들, 예를 들어 히스기야 때 해그림자를 뒤로 물린 일영표 사건이라든가(왕하 20:9~12),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사건도(마 14:22~33, 막 6:45~52, 요 6:19),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어떤 법칙을 만드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거기에 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이나 태양이 조금 천천히 도는 것에 대해서 우리로서는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그런 것들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고 우주를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올바른 삶과 구원을 위해서 쓰인 책이다. 과거에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생각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갈릴레오 사건이 바로 그렇다. 성경은 과학적 언어로 기록되지 않았고,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일상용어로 쓰여 있으며,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찬양하게 하도록 쓰인 책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통해 인식하는 악
원초적인 경험, 고통
하나님은 만물을 멋있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드셨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피조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그 인간이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는데,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일으키는 악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일까? 성경은 악을 타락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고통의 두 가지 원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악이라 했다. 따라서 악이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고통을 통해서 악을 인식한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악의 결과, 즉 고통을 겪어야 악을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 사랑이 어떻다고 정의하더라도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것과 같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병이 났을 때 고통스럽지 않으면 병을 고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아주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악이란 말은 그저 나쁜 것이 아니라, 주로 도덕적으로 나쁠 때 사용한다. 가령 자동차가 아주 나쁘면, 그 자동차가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적인 악이다.
고통도 하나의 감정이긴 하지만, 좀 특이한 성질이 있다. 단순히 행복과 대조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은 항상 계속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집 없이 돌아다니다가 새집을 짓고 입주하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만 몇 달 안 가서 곧 당연한 것으로 느낀다. 이 세상의 행복이란 것이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통은 그렇지 않다. 행복감은 얼마 지나면 사라져 버리지만,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되기 때문에 고통이 행복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
고통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고통이다.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무너지고 그 때문에 가족이 다치고 죽는 엄청난 고통이 있다. 이런 자연에 의한 고통을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악이라 불렀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 자연의 악이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 대신 사람들이 사람을 더 괴롭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문화를 건설한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고통을 줄이는 것을 함축한다. 가뭄을 막기 위해 댐을 막는다. 우리나라도 여름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아야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물은 댐에 다 있으니까 햇빛이 많이 비춰야 농사가 잘된다는 말이다. 하늘에만 의존하던 시대에는 비가 많이 와야 풍년이 들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은 이렇게 많이 줄었는데,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이 훨씬 많이 늘어난다. 제2차 세계대전에만 2,700만 명이 희생되었고, 독일 나치 정권은 유대인 600만 명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살육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어떤 자연 재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주로 걱정하는 것은 자연의 악이 아니다. 오늘날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사람이 가하는 것이다. 영국 기독교 문필가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5분의 4는 다른 사람이 가한다고 했다. 사람이 여중생을 강간하고 살해해서 그 시체를 하수구에 집어넣는 짓을 왜 하는가? 인간이 왜 그렇게 악한가?
인간의 만행과 죄악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농노의 아이가 아주 권세가 큰 장군의 개를 놀린 것에 장군이 화가 나서 농노의 아이를 발가벗겨 겨울 들판에서 뛰게 하고 사나운 개들을 풀어 놓는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개들이 아이를 물어뜯어 죽게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과거에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이 왜 그렇게 악한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육백만 명을 죽였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악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만행, 모택동의 살육도 그에 못지않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킬링필드 학살에서 지식인 200만 명을 죽였고, 캄보디아는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도층 부족이란 후유증을 앓고 있다. 국제 테러리스트조직인 알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 북한의 김일성 삼부자 등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물론 슈바이처, 테레사, 우리나라의 장기려 같은 성자들도 있다. 그러나 성자들의 수는 너무 적고, 악한들의 수는 너무 많다. 인간 전체로 보면, 악이 너무 커 보이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이고 신비다. 인간 사회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문제가 심각하지만,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직하게 일해서 살면 좋을 텐데, 꼭 도둑질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꼭 그렇게 비자금을 모아 로비를 해야 하는가? 맑은 정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진다. 다른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때로는 비양심적이고 위선적으로 행동하고, 그리스도인이란 위상에 어긋나게 행동한다. 이 세상은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자신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
악의 근원
죄와 악
인간과 자연에 고통을 가하는 죄와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한번 따져보자. 악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나 특성을 가리키고, 죄란 구체적으로 원칙을 어기거나 권위자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죄는 관계에서 나오고, 악은 경향이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법을 전제하지 않아도 인간은 악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짓는다고 하거나 죄가 있다고 할 때는, 그 행위가 죄가 되게 하는 명령이나 법칙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죄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과 세상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말로는 둘 다 죄라고 하지만, 영어에서는 씬(sin)과 크라임(crime)을 구분한다. 씬은 종교적인 죄, 즉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을 뜻하고, 나라의 법을 어겼을 때는 크라임을 쓴다. 요즘 일상에서는 sin은 거의 사라지고 crime만 통용된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드니까 ‘하나님 앞의 범죄’라는 말은 별로 쓰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권위에 반항하고 싶은 경향이 있다.
몸과 영혼의 이원론
그리스 사람들이 철학의 시대에 들어와서 지식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아주 옛날에는 지식보다는 사람의 악이나 선같이 근본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 인간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식의 문제이기보다 선악의 문제인데도, 요즘은 선과 악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요즘 우리는 법이란 제도를 만들어서 극악한 짓은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살인, 강간, 절도 등 무서운 범죄는 별로 줄어지지 않는다.
옛날 법이 없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는 사람이 아주 선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에도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모든 종교가 악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철학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설명을 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별히 인간에게는 몸이 있기 때문에 악이 생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주로 그리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졌는데 영혼은 고귀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표현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마 26:41, 막 14:28)란 말을 그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영향을 받아 우리도 ‘썩을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식의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성경에서 육신이라 했을 때는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몸뚱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처럼 우리의 이 살과 피를 육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모두 합쳐서 육신이라고 표현한다.
희소성에 근거한 설명
또 하나의 설명은 악을 희소성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희소성이다. 인간의 욕심이란 희소성에서 나온다.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공산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다. 그는 경제적 문제와 그에 근거한 온갖 부조리가 생기는 것은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리 있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으로는, 인류가 현재 생산하는 식량으로 세계 인구 전체가 충분히 먹고도 남는다. 미국 사람들이 버리는 음식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라는 말까지 있다.
희소성이란 정말로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에서 마르크스는 특정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못 가지도록 하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만 갖게 하면 욕심도 없어지고 죄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사유재산 제도라는 적절한 방법으로 많이 못 가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매우 논리적이고 간단한 이론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세상의 악이 사유재산 때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유재산 제도만 없애버리면, 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할 것으로 본 것 같다. 이런 관점도 존재론적 설명이다. 즉 도덕적으로 비양심적으로 행동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육체가 있거나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혹은 인간에게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죄(crime), 즉 법을 어기는 것도 특별히 그 사람이 못돼서가 아니라 합리성이 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앞뒤로 잘 따져보면 자기에게 손해라는 것을 뻔히 알 수 있는데도, 합리적이 되지 못해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 무슨 심보가 나빠서가 아니라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한다고 본다. 이것도 존재론적 설명이다. 머리가 나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가 나쁜 것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신화적이고 원시적인 설명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본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악이 생겨나고 죄가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존재론적 설명이란
존재론이란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김 군은 키가 160cm이다.”라고 하면, 그것은 김 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존재론적이다.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가령 “김 군이 못됐다.”라고 하면 그것은 도덕적 평가가 된다. 못됐다는 것은 자로 잴 수도 없고 무게로 달 수도 없다. 못됐다는 것에는 가치의 요소가 들어있다.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착하다, 악하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 가치 판단이라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비도덕적인 것과 제도의 결함을 연결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제도가 결국은 비도덕적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그것도 존재론적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제도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없던 악이 생겨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악이 있기에, 그 악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어쨌든 제도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학입시제도가 잘못되었기에 많은 부정이 생겨나고, 정부의 감사제도가 잘못되면 부정부패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금융실명제가 없었을 때와 그것이 생긴 이후 부패의 정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제도를 무시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제도가 원인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도덕적 선과 악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근본적 비판을 가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였다. 그는 존재에서 당위(當爲)가 도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머리가 총명하지 않다는 존재론적 사실에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나쁜 사람은 모두 비도덕적이 되고, 감옥에 갇히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 사실 도덕적 선과 악은 의지의 결정 문제이지, 그 사람이 타고난 상황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모든 악을 인간이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든가,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악의 최후 책임은 인간을 유한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이 져야 할 것이다.
자유의지에 의한 불순종
존재론적 설명이 옳지 않다면, 왜 사람은 악한 짓을 하고 죄를 짓는가? 정통 기독교에서는 ‘원죄’란 것을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인류에게는 원죄가 생겨났고,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을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주장을 최초로 제시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인간의 죄와 관련해 네 가지 단계를 제시했다.
첫 번째 단계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순진성의 단계로 죄를 범할 수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이고, 두 번째는 타락 이후 자연인의 상태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이며, 세 번째는 거듭난 사람의 상태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단계이며, 마지막은 영광에 이른 사람의 상태로 죄를 범할 수 없는 단계라 했다.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도 죄를 범했고, 그 때문에 인류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것을 원죄라 부른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그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로 간주되고 동시에 범죄 성향이 인류에게 생겨났다.
물론 우리는 그런 성향이 어떤 형태로 전해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우리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할 유혹을 받고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아주 어려서 죽은 아기 외에는 아직 아무도 일생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하면, 이도 역시 악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원죄를 강조해서 아무도 실제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범죄를 방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에게 악을 저지를 경향과 유혹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악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실제로 그렇지 않다. 아무도 악행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아무도 악행만 하도록 운명되어 있지는 않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은혜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비록 완전히 타락해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류에게 회개하고 죄를 범하지 않을 가능성과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내가 죄를 짓는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고 범한 죄를 회개하고 이웃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생겨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데도 죄를 지을 때 진노하신다.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구속
창조 상태의 회복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창조, 타락, 구속,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는데, 구속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타락과 범죄는 우리의 삶과 피조 세계 전체의 건강과 조화를 파괴하고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오며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거기에는 인간의 허망한 욕심, 교만, 미움, 거짓, 불의 등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악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 주었다. 만약 그런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면서 동시에 소망의 종교다. 잘못된 것이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미래지향적 종교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대변한다. 우리에게는 회복과 개혁이 가능하다.
우선 개혁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부터 생각해보겠다. 개혁이란 말은 적어도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지금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잘못되지 않았으면 개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된 것을 고칠 가능성이 있어야 개혁할 수 있다. 개혁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 타락이다. 그리고 개혁은 그 타락한 상태를 고칠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긍정적인 상태로의 회복을 우리는 구원 혹은 구속이라고 말한다.
구속은 먼저 창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 즉 회복(回復)을 말한다.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보기 좋게, 인간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괴되고 병든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구속은 그렇게 망가지고 일그러진 상태에서 창조 본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여기서 회복이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 에덴동산의 상황으로 돌아감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우리의 세계관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구속이란 단순히 개개인의 영혼, 즉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혹은 범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그 영향을 전 우주에 미친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개인 영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모든 것에 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에서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사회나 문화나 역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들은 주로 복음주의자들이 작사하고 작곡한 것인데, 대부분 영혼 구원에 집중되어 있다. 사회, 문화, 정치 등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런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찬송은 거의 없다. 우리 찬송가가 상당히 좁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세계관을 대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주로 그런 신학적 배경을 가진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구속과 운명
구속은 노예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져서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을 때는, 자신과 가족이 모두 채권자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그 빚을 다 갚기 전에는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빚을 진 정도만큼만 일해주고 나오면 될 것 아니냐’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오늘의 상황을 전제로 한 생각이다. 고대 사회의 노예는 이미 주인의 소유이므로 그의 노동의 대가는 주인의 몫이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을 갚을 수가 없다. 단순히 품삯을 받는 머슴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빚을 대신 갚아주어야 비로소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구속이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 머리를 아무리 끄집어 올려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누가 바깥에서 잡아 올려주어야 물에서 올라올 수 있다. 인간이 죄를 범해서 타락했다는 것은, 바로 물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구속을 말할 때 우리가 전제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게 되어서 그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같은 종교는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하고 도를 닦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절대적인 타락을 전제로 한다. 사람이 죄를 범하여 완전히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상태를 죄의 노예가 됐다고 한다. 그러면 그 죄란 무엇인가? 흔히 죄를 지으면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귀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귀에게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의 영혼을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빼앗아 나오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죄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일반사회에서 죄란 법을 어기는 것 아닌가? 기독교에서는 그 법은 물론 하나님의 법이다. 결국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하면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셨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법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에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법이 없었다면 죄가 성립될 수 없었다. 법을 어기면 반드시 거기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칙도, 하나님의 법칙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 것을 인과보응의 법칙이라고 한다. 인과보응의 법칙은 불교에서 매우 강조된다. 그것을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거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선을 많이 행하면 선이 쌓이고 악을 많이 행하면 악이 쌓인다고 한다. 그래서 선을 많이 행하면 악이 조금씩 줄어지고 선이 점점 쌓이면 다음 순회 때 좋은 삶을 잘살게 된다고 가르친다. 카르마는 아무도 고치거나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운명의 법칙이다.
천주교 신학에도 이런 법칙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본래 주어진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생겨난다. 개신교는 인과보응의 법칙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전제해야 성경의 여러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과보응의 법칙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꿀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욥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기에서는 인과보응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욥이 그렇게 많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엄청나게 무서운 벌을 받는다. 욥은 자신이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벌을 내리시냐고 인과보응의 법칙에 따라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로 인과보응의 법칙에 따라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벌을 받는다고 계속 비판한다. 욥기 끝에 보면, 욥이나 그 친구들 모두가 다 잘못 생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과보응의 법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므로 그분이 원하시면 벌을 줄 수도 있고 복을 줄 수도 있다.
이처럼 욥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은 인과보응의 법칙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인과보응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인과보응의 법칙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리고, 오늘부터 죄지은 사람 모두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해버렸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얼마나 존중하셨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겠는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했다.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므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심으로, 즉 죗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그 벌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구속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화해와 회복
구속은 화해의 전제조건이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원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름답고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됐는데, 죄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구속으로 인해 다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구속과 관련해 성경에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죄로 인해 낡아진 것을 다시 새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통틀어 ‘구원’이란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어로 ‘소테리아’인데, 건강이란 뜻도 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건강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이 구속함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세주라는 말과 의원이란 말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유사한 뜻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의사가 곧 구원하는 사람이란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구속, 화해, 갱신, 구원, 거듭남 등이 모두 원상회복 혹은 복귀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건강하게 창조하셨는데 죄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지고 갈라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원래보다 더 나은 상태로의 회복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옛날과 똑같이 되는 것이냐 아니면 그보다는 더 좋은 상태로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병 나기 전보다 더 건강해지는 일도 있다.
그러면 구속받은 상태가 오히려 창조의 상태보다 더 좋아지겠는가? 아무래도 한 번 금이 갔기 때문에 원상태만큼 좋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성경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이전 상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의 역사란 타락 이후의 역사이고, 우리의 사고방식, 지식, 경험이 모두 타락 이후의 상태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타락 이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상세히 모른다. 참고로 독일 철학자 칼 뢰비트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역사는 타락으로부터 구속된 구원의 상태가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훨씬 더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구속의 역사는 온전한 상태에서 타락한 상태로, 타락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발전하는 과정이고, 그 완전한 상태는 소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
우리는 ‘이미’ 천국 백성이지만 ‘아직’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위치를 이중적으로 만든다. 완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도 아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나그네’라 한다. 베드로전서에는 ‘나그네’란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핍박받는 성도들을 그렇게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나그네란 사실을 매우 강조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도시 바벨론에서 나그네들이고, 나그네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육신의 수요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국의 문필가요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그의 고전 『천로역정』에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일생을 역경에 가득 찬 나그네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동일하다면 우리가 나그네가 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요 17:16).
나그네의 특징은 자신이 여행하는 곳을 영원한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대해서 자기 고국만큼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에 이 세상일에 모든 관심을 다 기울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기에 거기에 모든 관심을 다 기울여야 한다. 기독교인이 애국자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으나 단순히 자기가 속한 땅의 나라만 사랑하는 애국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자기 나라의 이익만 바라고 추구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는 기독교와 병존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란 사실은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고, 세상 것을 상대화하며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돈, 지식, 명예, 권력 등을 추구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상대적 가치만 인정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돈,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그는 진정한 나그네가 아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돈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없고, 돈을 벌어도 올바로 쓸 줄 모른다. 돈을 상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쓸 수 있다. 돈을 상대화하는 사람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은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기부했다. 그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보다 더 돈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이나 명예도 그렇다. 권력이나 명예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얻기도 힘들겠지만, 얻는다고 해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사회개혁
그러나 나그네에게 약점도 있다. 이 세상에 대해 소극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된 그리스도인은 사회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에 사회를 소홀히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옳은 태도는 아니다. 비록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임무를 받았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고 공의로운 세상이 되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이웃에게도 덕이 된다. 사회를 위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특히 사회가 정의로우면 사회적 약자의 권익이 보호받는다.
만약 우리의 노력으로 사회가 깨끗해지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병든 자와 가난한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이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라면, 사회를 정의롭게 개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사회가 부패하면 그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부패에 쉽게 감염된다.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유럽 연합으로 통합되어 여러 나라가 거의 한 나라처럼 되어있고, 화폐까지 같이 쓰는데도, 사회의 의식 수준에는 차이가 컸다. 왜 어떤 사회는 부패하고 다른 사회는 정직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도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이뤄진다. 사회가 깨끗하면 그 사회에 사는 개인도 정직해질 수 있고, 정직한 개인이 많아지면 사회도 깨끗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먼저 고쳐야 할 것은 개인이지 사회가 아니다. 사회는 합리성도, 양심도 없다. 그러므로 사회를 훌륭하게 만들려면, 먼저 소수라도 개인이 먼저 훌륭하게 되어야 하고,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나라에서도 소수의 선각자가 나와서 “이래서는 안 된다.”, “고쳐야 한다.”라는 운동을 상당 기간 계속한다면, 이웃 나라처럼 정직해질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더 악해질 수도 있고 더 착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선구자가 되어야
사회와 개인이 상호작용하지만, 변화의 단초는 개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했는데, 그 개인이 누구이겠는가? 그 사회를 개혁하려면 그 사회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부패한 사회에서만 일생을 보낸 사람은 부패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구태여 고치려 하지 않는다. 부패가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려면, 부패하지 않은 사회에 대해 알아야 하고, 부패하지 않은 사회에 대해 알아도, 그것이 좋고 자기 사회가 나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 사회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다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그네이므로,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초월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개혁의 선구자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특히 약자에게 큰 이익을 줄 것이므로,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다.
의무라도 그 의무를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고, 동시에 문책받을 이유도 없다. 초대교회는 너무 약해서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대한 세력을 행사했던 로마를 개혁하는 것에 대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약성경에 사회개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이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힘은 씨앗의 형태로 있다가 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취급한 것이나, 여성들을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존중한 것은, 그 시대 사회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오늘날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평등사상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평등사상을 사회 제도로서 정착시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좀 더 담대했다. 전체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3.1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었고,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절반을 기독교인이 주동했다. 양반과 상놈의 사회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섰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현대 교육과 현대 의술 도입도 기독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런 봉사 때문에 기독교는 한국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서, 서양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 가운데서 한국은 기독교가 서양종교란 인상이 거의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만약 기독교에 대한 그런 긍정적인 인상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소수라도 신실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면, 사회개혁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수와 영향력이 상당할 정도로 커져서 사회를 개혁할 능력이 있는데도 잘못된 사회를 그대로 방치하면, 이는 직무 유기이고 하나님의 명령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불순종이다. 사회가 거짓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면 그 책임은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그런 부정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부패해서 질서가 없어지면, 그 사회의 강자들은 덕을 보고 더 편리하게 살 수 있지만, 약자들은 큰 해를 입는다. 그러므로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우선 그리스도인 자신의 성결한 삶을 위해서 필요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길이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리스도인은 사회개혁에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