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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따지는 변호사] 요약 (이재훈 / 예미, 2024년)

by 이나이신기 202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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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따지는 변호사
이재훈 / 예미

이재훈 변호사 『그림 따지는 변호사』를 읽고

“그림을 보고 법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이 문장은 책 『그림 따지는 변호사』의 프롤로그에서 만날 수 있는 문장이자, 이 책의 핵심적인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을 감성의 영역, 법을 이성의 영역이라 구분하곤 한다. 예술은 자유롭고 무형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반면, 법은 냉정하고 구조화된 규범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두 세계가 만났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책은 바로 그 만남의 지점을 탐색한다. 변호사로서의 전문성과 예술에 대한 애정, 그리고 13년에 걸친 칼럼 연재라는 꾸준한 작업의 결실이 한데 어우러져 ‘예술 속 법 이야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냈다. 저자 이재훈 변호사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작품 속 장면이나 사연을 발판 삼아 일상적인 법적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이슈,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딜레마까지 치밀하게 풀어낸다.


1. 예술을 ‘법적으로’ 감상하는 색다른 시선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일상생활과 법, 지식재산권, 아동 및 가족 관련 법, 동물권, 사회적 사건 및 이슈 등으로 주제를 나누고 있으며, 각 장마다 대표적인 예술작품과 함께 그 속에 숨겨진 법적 쟁점을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책의 첫 번째 장 「그림 속 진주, 빨래, 자전거에 대한 고찰」에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통해 진주의 법적 정의에 대해 탐구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진주를 보석이라 여기지만, 법적으로는 귀금속도, 보석도 아닌 독립적인 분류에 해당한다는 점을 짚는다. 개별소비세법, 국가기술표준 등을 근거로 들어 독자들에게 진주의 정체를 친절하고 흥미롭게 설명하는 방식은, 법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법적 사고의 맛을 전해준다.

한편, ‘자전거를 자전거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글에서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바탕으로, 자전거의 제동장치 기준이 어떤 법률에 따라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는 단순한 회화 감상이 아니라, 그 장면이 우리 현실 속 법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접근이다.


2. 예술과 지식재산권, 그리고 생성형 AI

특히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두 번째 장 「창작과 복제 사이, 그 어디쯤」이다. 이 장은 오늘날의 핵심적인 논쟁인 ‘지식재산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예술작품을 매개로 풀어낸다.

예를 들어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과연 창작물인가 복제물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인간의 얼굴 사진을 학습 자료로 활용하는 경우, 초상권 침해의 소지가 발생하며 이는 기술과 법이 충돌하는 새로운 전장임을 시사한다.

또한 튀튀(tutu)와 같은 무용복 디자인이 단순한 복장이 아닌 저작권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또는 특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그림이 원저작물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등 실생활과 연결된 논쟁을 소개하며, 다양한 판례와 실제 사례를 통해 독자들이 생각의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돕는다.


3. 아이들과 동물, 약자를 향한 시선

책의 세 번째 장은 아이들을, 네 번째 장은 동물을 다룬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단순히 법 해석에 그치지 않고, 법이 지향해야 할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배려를 강조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아빠랑 살래? 엄마랑 살래?’라는 글은 부모의 이혼 시 자녀의 의사 결정권에 대해 묻는다. 현재 우리나라 법상 미성년자의 의사 표현은 어느 정도 반영되지만, 실질적인 권리로 인정받기까지는 제약이 많다. 아동 인권이 단순한 보호의 대상에서 능동적인 권리의 주체로 변화해야 함을 강조하는 저자의 시각은 매우 설득력 있다.

또한 고야의 작품을 통해 동물보호법을 설명하거나, 낙마 사고를 예술작품과 함께 조명하면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윤리적 책임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법이 단순한 규칙을 넘어 ‘공존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4. 명화 속에 비친 사회적 갈등과 법적 대응

마지막 장 「변호사가 읽어주는 세상」은 말 그대로, 사회적 사건을 예술작품을 매개로 해석한다. 스토킹, 폭행, 환경 범죄, 의료 과실 등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며, 각 사건에 대해 법의 시선으로 접근한다.

특히 ‘그의 부재중 전화’에서는 아폴론 신화와 함께 스토킹 범죄를 다루고 있다. 일방적 애정 표현이 어떻게 위협이 되는지, 스토킹 처벌법이 가지는 한계와 기대에 대해 짚는다. 또한 ‘지구를 살려라’에서는 시슬레의 풍경화를 통해 기후위기와 관련된 국제법, 환경법의 과제를 설명하는데, 예술작품이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5. 예술과 법, 그 경계에서 인간을 만나다

『그림 따지는 변호사』는 단순히 예술을 법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통해 법이 놓치기 쉬운 인간의 감정과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고, 동시에 법의 언어로 예술을 다시 정돈함으로써, 그 경계 지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책은 법률에 문외한인 독자에게도, 예술에 무심했던 법조인에게도, 그리고 교양으로 세상을 넓히고자 하는 모든 독자에게 유용한 지적 자극이 될 것이다. 특히 생생한 판례와 흥미로운 예술사적 배경, 그리고 법적 해석이 어우러진 이 책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선 ‘통합적 사고’를 요구한다.


마치며: 법은 인간의 삶을 닮아야 한다

이재훈 변호사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그림에는 죄가 없지만, 따져보면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법의 세계가 감정과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예술은 인간의 삶을 가장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렇다면 그 예술 속에 담긴 문제를 따지고 책임을 묻는 법 역시 인간의 삶을 닮아야 한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너무나 세련되게, 따뜻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림 따지는 변호사』는 단순한 미술 에세이가 아니다. 법과 예술을 함께 고민하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드문 시도이며, 동시에 성공적인 융합의 결과물이다. 법은 차갑지 않아야 한다. 법은 인간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메시지를 그림 한 점 한 점에 법적 상상력으로 수놓은 이 책은, 그래서 읽는 내내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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